붕개 감기 ;신기한 인연의 순간이 될 수도 있는
"너무도 긴장한 나머지 진경의 머리에 둘둘 감긴 그 멍청한 붕대를 세연이 콱 당긴 순간부터, 그래서 눈앞에서 수많은 별들이 팍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터지고, 입에서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온 그 순간부터, 진경은 이것이 아주 신기한 인연이라고, 이 바보 같은 아이를 어쩌면 평생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근거 없는 예감을 품었었다."
(382쪽/446쪽)
이 소설은 이렇게 진경과 세연이 고등학교 시절에 '붕대 감기'라는 교련 시간에서 특별한 만남을 통해 친구가 되고, 또 그렇게 40대가 되도록 진짜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을 다루는 소설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흥미진진한 사건, 긴장감, 갈등 구조가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두 사람과 직접이든 간접이든 어떡하든 연결이 되는 수많은 여성이 나온다. 연령대도 직장도 모두 다른 수많은 여성들. 그리고 그들이 자신과 관계된 여성들에 대한 생각이 각자 다르게 펼쳐진다.
수많은 "여성들의 우정"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거창한 시간과 사건 속에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상황과 내면의 갈등이라는 범주 내에게 리얼하게 다루고 있다.
그야말로 페미니즘을 넘어서서 페니니즘'들'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 최대의 매력은 학생, 전문직 여성, 미혼녀, 비혼녀, 전업주부, 워킹맘 등 다양한 연령층(나이, 직업, 취향, 기질 등)과 사회 구성원(직업군)으로서 여성의 일상과 그 일상적 삶에서 빚어지는 섬세한 감정들을 리얼하게 포착했다는 점일 것이다. 사회의 억압성과 그 안에서 다르게 숨을 쉴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그 생각들을 예리하게 포착했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등장은, 세연이 작가로서 기획하는 프로젝트 '여성들의 우정'이라는 카테고리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삶과 계층의 여성들이 만나고 우정을 쌓다가, 그리고 갈등하게 되고, 다시 만남이 이루어지는 등 일련의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관계가 멀어진 사람들에게 굳이 화해와 용서라는 단어와 그 과정을 억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저 상대의 안부를 물어 주고 내밀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그 자체로 타인과 공감이 형성될 수 있다는 메시지만이 전달되는 느낌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어떤 결과로만 타인을 이해했을 때 발생하는 수많은 오해도 고스란히 그려 낸다. 그래서 그냥 우리들,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이야기 초반부 제공하는 해미의 미용실 - 지극히 여성성이 강조되는 공간이자, 여성성을 해방시키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이 미용실을 어렵게 찾아 나서는 은정-서균의 엄마-은 이곳에서 위로받고자 한다. 머리를 감겨 주고 헤어 영양제를 발라 주는 손길을 통해서. 그리고 해매의 집안에서 이어지는 지현과 해미의 대화. 이 장면들에서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에 대해서 사소하지만 신선한 자료를 제공받는 느낌이다.
이렇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방식들이 종종 등장한다. 진경이 은정의 엄마와 신기한 우연으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리고 지현이 해미에게 마음을 터놓으면서 위로를 받게 되는 장면들. 직장 선후배인 효령과 명옥의 연대 - 공동명의 주택 구매, 비혈육의 가족 구성 등.
이 소설에서 말하는 여러 시점의 페미니스트들. 심화된 형태도 등장하는 페미니즘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의 특정한 누구를 옹호하기 위한, 또한 그들 중 누구를 변명하기 위한, 그 어떤 논쟁도 투지도 없다. 다만 다른 상황에서 다른 맥락에서 다른 배경에서 탄생한 페미니즘적 입장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독자들, 사람들) 할 일은 무엇일까?
작가는 위와 같이 질문하고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다. "상대의 단호함과 편협함마저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 상처받을 것이 두렵다고 해서 관계 맺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붕대 감기"라는 제목이 말하는 함축적인 의미는 "성숙하지 못한 경험, 고통, 실패", "고통이 따르는 일이라도 불완전함을 함께 하는 것" 등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은, 고등학교 시절에 만나 사십 대가 된 지금까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는 '진경'과 '세연'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시작한다. 그리고 그 둘로부터 마치 가지를 치듯 뻗어나가는 여러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자유연상의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여성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의 이름과 에피소드가 등장하여 인물 구조(인물 관계도)를 그려내며 읽어야 제대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이야기가 하나의 중심(결말)으로 수렴되지도 않으니 그저 들려주는 대로 읽어도 그만이다.
그저 우리는 작가의 바람대로 잘 들어 주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또한 그들의 불완전함과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