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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찻잎향기 Jul 11. 2020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여왕의 삶이란..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 아주 짧은 리뷰 ::




비운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일대기를 그린 사극이라, 사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관심을 갖게 되는 소재이다. 그리고 주연 배우가 시얼샤 로넌과 마고 로비라. 그녀들의 인상과 의상이 강렬하여 결국 '나만의 주말의 명화'로 찾아 보게 되었다. 




영화의 매력이자 강점은 배우의 인상과 의상이 지배한다. 


역사적인 사실이 스포인지라 그 결과의 내막을 상상하고 싶었는데, 영화의 상상력은 빈약한 편이다.


왜냐하면, 여성의 용기와 연대, 남성의 오만과 편견, 귀족들의 여성 비하 등의 메시지로만 집약하려는 의도가 그 외의 상상의 여지를 망쳐버린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충분히 매력적이며 드라마틱한 메리, 여왕의 신념과 죽음을 있는대로 풀어가기만 해도 극적 재미와 긴장이 넘쳤을 것인데. 너무 한 쪽 주제로 옭아맨 듯한 답답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오히려 서사적인 재미가 줄고 밋밋한 나레이션 (주로 손편지글)으로 전달되는 느낌이다. 




16세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강렬한 색채, 고풍스런 의상들은 의상상을 받을 만했다. 또한 그것들과 궁합이 잘 맞는 여배우들의 용모와 태도, 연기 등은 일품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스토리와 극적 장면은 다소 짜집기 식으로 나열하여 심심하게 다가왔다. 




용모, 가치관, 신념이 다른 두 여왕의 팽팽한 대립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면, 나처럼 꽤나 실망할 것이다. 그런 대립과 기대는 거의 나레이션과 편지글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여왕 메리의 일대기와 죽음을 단편적으로 다룬 점이 이 영화의 최대 실수인 것 같다. 






:: 이 영화를 보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 ::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또는 보고 난 후에 꼭 찾아 보는 정보들이 있다.  




= 스코틀랜드 여왕 : 메리 스튜어트 


= 잉글랜드의 여왕 : 엘리자베스 1세 


= 그리고 여왕 메리의 비극적인 죽음 




이들을 종합하여 아래처럼 정보를 요약해 본다. 




[정보 1]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 장면




스코틀랜드의 메리(1542~87)는 출생 6일 만에 부왕 제임스 5세의 사거로 스코틀랜드 여왕이 되었다. 섭정을 맡은 프랑스 출신의 어머니는 메리를 다섯 살 때 프랑스로 보냈고, 그곳에서 자란 메리는 1558년 프랑수아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하여 이듬해 프랑수아의 왕위 즉위로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나 다시 그 이듬해 프랑수아가 죽었다.

메리의 결혼 몇 달 후 잉글랜드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할 때 계승권 문제가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메리의 할머니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의 누이였는데, 이 관계로 메리는 잉글랜드의 튜더 왕조에서도 엘리자베스 다음의 계승권을 가진 위치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가톨릭 세력에서는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 볼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을 원천무효로 보는 관점에서 진정한 계승권자는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메리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앙리 2세는 이런 주장을 이용해 잉글랜드를 넘보려는 뜻으로 메리를 며느리로 맞아들인 것이었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그렇게 하고 나서지는 못했다.

1561년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진짜 여왕 노릇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메리는 가톨릭이었는데, 그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스코틀랜드의 공식 종교가 개신교로 바뀌어 있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메리는 이방인이었다. 1567년 왕위에서 쫓겨나고 2년 후 잉글랜드로 망명할 때까지 메리의 행적은 한 마디로 어지럽기 짝이 없다. 상황을 험하게 만드는 쪽으로 매진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프랑스 왕실에 기대어 계승권 시비를 일으켰던 일로 메리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던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가둬 넣을 꼬투리를 메리의 행적 중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메리는 유폐를 벗어나기 위해 처음에는 애원에 몰두하다가 통하지 않자 음모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불만을 품은 여러 세력은 메리의 계승권에서 반란의 실마리를 찾으려 거듭거듭 획책했다.

십여 년간의 유폐 상태 동안 치명적이 될 만한 음모 발각이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엘리자베스가 메리의 처단을 회피하려 매우 애쓴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된다. 그 하나는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극한 대립을 피하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군주에 대한 형사적 책임 추궁이 군주의 근본적 권위를 손상시킨다고 본 것이었다.   (이 역사적인 배경을 영화에서는 '여성들의 동지적 입장, 차이 이해, 결혼과 출산에 대한 차이 또는 연대 의식' 등으로 해석하려고 애쓴다.)

마침내 메리가 반역죄로 잉글랜드 법정의 재판을 받게 된 것은 프랑스의 내전에 스페인이 개입하고 있어서 두 나라 반응에 잉글랜드가 신경 쓸 필요가 많지 않을 때였다. 스코틀랜드 왕으로 있던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1566~1625, 1603년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제임스 1세)조차 자기 어머니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이 아들을 얻기 위해 여왕 메리가 어떤 혼신의 노력을 했는지, 이 장면들은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룬다)




 [정보 2]  잉글랜드 여왕 ; 엘리자베스 1세 




생애 : 1533년 ~ 1603년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녀는 통일령을 선포하여 국교회가 주도하는 종교 질서를 확립하여 신교국가의 본격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일련의 입법을 통해 산업화와 가격혁명에 따른 부정적 결과들을 조절하려는 대응책을 추진했고, 잉글랜드 사회정책의 초석이 되는 구빈법을 제정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7세 때 처음 시도되었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도 재개하였다. 그녀는 가톨릭의 수호자인 에스파냐와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개신교를 구하고, 잉글랜드가 대양으로 본격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치세 말기 특허를 주어 동인도 회사의 교역활동을 도왔다. 






:: 영화 리뷰 마무리 ::




영화 속에서는 엘리자베스의 왕의로서의 업적보다는 여왕으로서의 고뇌, 갈등, 집착 등을 주로 다룬다.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회의, 아이에 대한 집착 등에 대해 초점을 맞추다 보니, 왕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성 영화'로서 주제가 한정되는 느낌을 받는다. 어찌 보면 그런 주제 접근이 영화를 안타깝게 바라보게 하는 지점을 만들어 둔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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