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길 위해서 내가 할 일은
길 위에서 내가 할 일은
도서 리뷰 [오래 준비해 온 대답]
"리파리는 두 얼굴의 섬이다. 잠깐 왔다 가는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얼굴과 오래 남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얼굴이 있다." (121쪽)
어떤 여행지의 숨은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그 얼굴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곳을 적어도 두 번 이상, 한 달 이상, 체류해야 한다.
김영하 작가는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뉴욕, 밴쿠버, 이탈리아 등을 그렇게 자유롭게 다닌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된 여행 경험과 감성과 성찰의 한 부분이 이렇게 책으로 다시 정리되었다.
그렇게 여행을 즐기고 공유하는 또 한 사람, 방송 PD와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EBS 여행 채널 '테마 기행'이 탄생되었고. 그 탄생의 시작을 '시칠리아' 여행이 마련해 주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렇게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사람들의 여행 경험인 냥 곰국으로 끓여졌고. 또한 그 바탕을 토대로 오늘날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다. 또한 간접 여행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 나름의 희열을 느끼는 시청자들에게 여전히 꾸준히 사랑받는 장수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 책은 '과거의 내가 보내온 편지'같은 추억과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약속' 같은(11쪽) 그리움이 내재되어 있다. 여행은 그런 것 같다. 이 곳을 떠남과 동시에 현재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고, 낯선 곳에 가서야 비로소 그 성찰이 완성되는, 그렇게 길 위에서 나를 둘러보게 만드는 최고로 깊고 큰 거울이 되어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은 마치 예정된 운명의 실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불쑥 나오는 그곳에 어느 날 문득 가 있을 수 있는 시간처럼 말이다.
1. 이 책은 돌고도는 여행하는 책이 되었다.
=: 내가 갖고 싶어서 이 책을 구입했다. 먼저 친구에게 보내서 읽게 하고, 나에게 다시 주라 했다.
=: 나 또한 그렇게 읽고 다른 친구에게 줄 일이다.
=: 책에 호흡을 불어 넣는 일은, 많은 이들이 그 책을 읽는 것.
=: 그렇게 이 책은 돌고도는 여행을 시작하였다.
=: 책도 길 위에서 더 풍부해 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다. 책의 여행 시작일 6월 17일~
2. 프롤로그 : 언젠가 시칠리아에서 길을 잃은 당신에게 (10-11쪽)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흘러들어가 놀라운 발견을 거듭하던 그 시절의 여행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10쪽)
"어떤 나라나 도시를 마음에 두었다 한동안 잊어 버린다. 그러다 문득 어떤 계기로 다시 그곳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곳에 가 있다" (11쪽)
(친구가 밑줄을 그은 부분이다. 충분히 공감가는 문장들이어서, 여기에 옮긴다.)
3. 인생은 '내 안의 소박한 예술가'를 만날 때마다 황홀한 기쁨을 준다.
책을 읽으면서 가끔 작가에게 심하게 몰입되는 순간들이 있다.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작가가, 어느 날 문득 숨막히는 갑갑함과 공허함을 동시에 느끼는 그것,
문득 나 또한 그런 날들이 있다. 인간이니까 충분히 느끼는 감정들이라 여기지만, 뭐가 부족해서!
이럴 때마다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은데. 그런데 사람은
여기서 두 종류로 갈리나 보다. 훌쩍 떠나는 사람과 아무 곳에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과.
그런 후자같은 나에게 대리 만족, 간접 경험을 안겨 주는 일들이
이런 책에서 만나는 문장들인 것 같다.
"선생에게는 지식 외에도 많은 것이 요구된다. 친화력, 학생에 대한 애정... 등... 무엇보다 선생에게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22쪽)
세월이 흐를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두렵다, 나에게 확신이 없다는 사실이 자꾸만 발견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는 일이.
"나는 내 안의 어린 예술가와 혹시 내가 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학생들 내면의 어린 예술가들을 마침내 구해낸 것일까?"(29쪽)
아직도 나는 저 위의 문장과 그 심정 위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위태롭게 서 있다.
2. 133쪽 : 저격수는 멈춰 있는 대상을 노린다.
저격수는 멈춰 있는 대상을 노린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표적을 지켜보다 조용히 한 방.
향수 역시 머물러 있는 여행자를 노린다.
이 부드러운 목소리의 위험한 저격수를 피하기 위해
신중한 여행자는 어지럽고 분주히 움직이며 향수가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다.
방심한 여행자가 일단 향수의 표적이 되면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그럴수록 그는 더더욱 한곳에 머물러 있고자 하며
마냥 깊은 우물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속에 자기가 찾는 모든 것이 있다는 듯이.
그러나 세상의 모든 우물이 그렇듯 그곳은 비어 있다.
=::
그 부드러운 향수가 나를 저격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지금 마냥 깊은 우물 속에 빠져 있는 지경이다.
크게 한 방이 필요할 것 같다.
3. 첫만남=: 41쪽에서
한 다큐멘터리 PD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EBS에서 새로운 여행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파일럿 프로그램을 찍으러 함께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야 하는 거냐고 물으니, 그건 아직 결정돼 있지 않다고 했다. (...)
처음에 그는 <검은 꽃>의 무대인 라틴아메리카가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이미 거기를 두 번이나 길게 다녀온데다 가는 길이 너무 멀고 험해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럼 혹시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 없었어요" 라고 물었다.
"시칠리아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 같았다. (...)
그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나는 한 번도 시칠리아에 가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거긴 어쩐지 내가 영원히 갈 수 없는 곳. 그린란드나 남극 같은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시칠리아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
세상에 준비되지 않는 대답이 오히려 마침 정답처럼 내 인생을 좌우할 때가 있다.
내 무의식을 어떤 이유로든지 지배하고 있던 그것이,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툭 튀어나올 때는,
그것이 운명이요, 필연일 수 있는 게다.
이 책의 제목과 함께 작가 김영하님의 시칠리아 여행 시작은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결정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대로 살아가는 거야."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속담?"
아내가 짐짓 딴지를 걸어왔다.
"그러니까 여행을 해야 된다는 거야."
"결론이 왜 그래?"
"결론이 어때서?"
우리 말고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잡담이 거센 바닷바람에 풀어지는 사이, 시칠리아섬은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시칠리아여, 안녕! Arrivederci, Sicilia!
=:
이 마무리 부분을 나의 인생 파트너에게 꼭 읽어줘야겠다. 은퇴 후- 해외 여행은 육십부터라고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는 나의 동반자에게, 그야말로 여행은 두 다리 튼튼하고 심장이 두근거릴 때 가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설득을 해 봐야겠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Memory Lost
여행을 하면서 무엇을 해야하나!! 나의 파트너가 묻는다면.
"과거에 무엇을 잃었나, 앞으로 무엇을 잃으면 안 될까?"
내가 여행의 길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성찰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