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란... 첫단추, 장발, 춘천같은 것
이 소설의 이야기는 '김진호'라는 서술 화자(작가, 또는 작가의 분신 같은 그 시대 청춘들)가 20대 시절의 자신의 체험을 직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다큐와 픽션의 경계에서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근거 없이 자신의 청춘이 가엽던 시절. 그것은 어쩌면 춘천 호반에서 일어나는 안개처럼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순원 작가의 장편소설 『춘천은 가을도 봄』은 1970년대 후반에 춘천에서 청춘을 보냈던 한 소설가의 회고담이다.
소설은 “돌아보면 어느 한순간인들 꽃봉오리가 아닌 시간이 있으랴만 시기로는 ‘유신’의 한중간으로부터 ‘5공’의 초입에 이르기까지 차라리 얼룩이라고 불러도 좋을 나 자신의 이십 대에 대하여.”라고 말함으로써 곧장 소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소설은 크게 주인공 김진호가 대학에 입학 후 시위에 참여하여 제적 처분과 기소유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건과 일 년 반 후에 두 번째로 입학한 대학에서의 시간을 그려 보인다. 또 다른 한 축은 친일에 힘입어 재산을 축적한 진호의 집안이 고향 명진에 자리한 배경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나서는 아버지 김지남을 통해 당대 권력에 업혀 경제적 이득을 쫓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진호가 다닌 두 곳의 대학과 더불어 두 곳의 하숙집에서의 상이한 풍경과, 당대 젊은이들이 드나들던 디제이 다방이며 학보사 활동이며 교련 시간 등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음은 물론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1. 장발 = 그 시절, 20대 청춘들의 자유에 대한 집단적 표현이자 유일한 몸의 반항과 같은 것
지금도 나는 전철이나 버스 안 카페 같은 곳에서 어깨까지 길게 머리를 늘어뜨린 이십 대의 장발을 보면 문득 나 자신의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그 시절 장발은 우리에게 단순한 유행 이상이 무엇이었다. 때로는 그것이 젊은이에 대한 사회적 우려의 상징과도 같은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실상 그 시절 우리의 장발은 기성세대들이 염려하는 바대로 퇴폐의 한 징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이 처음 유행했던 곳의 젊은이들에게는 방종이라도 불러도 좋을 넘치는 자유의 확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그 길이 만큼도 되지 않는 자유에 대한 집단적 표현이자 그 시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몸으로 몸으로의 반항과 같은 것이었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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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말이 길어져 장발에 대한 변명처럼 들렸을지 모르나 그건 내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나를 덮쳐 누르고 있던 장발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1977년 3월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던 나의 두 번째 대학 생활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살아 낸 20대 청춘들은 말한다. 그 시절의 퇴폐는 '반항'이자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라고. 시대가 그랬고 정치판이 그렇게 성장시켰다고.
2020년대를 살아가는 20대 청춘들은 무어라고 말할까. 정치, 시대를 논하지 않는 이 시절 청춘들도 그들의 무기력과 방황과 불확신을 또한 '반항'이자 '자유 의지'라고 말한다.
아이러니하다. 시대는 어마마한 격변을 맞이해서 강산이 몇 번을 바꾸어도, 20대 '청춘'들의 방황과 꿈과 좌절과 퇴폐는 한결같이 모호하다.
2. 단추, 갈매기의 꿈 : 청춘이 청춘에게 보내는 의지
- 첫 단추를 잘못 끼우지 않았으면 함께 서울에 있을 텐데 말이죠.
- 단추라. 그게 통속적인 출세를 위하여 하나하나 채워 나갈 절차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보기에 잘못 끼워진 것이 아니다. 네가 얼마나 의지를 갖고 끼웠느냐 아니냐 차이이지.
- 지금 보면 어느 쪽이라도 그렇죠.
- 너는 여기 내려와 허송세월 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게 덧 없이 보낸 시간이 아니다. 청춘이라는게 원래 그렇지.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꽃으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본인들에게는 춥고 습한 계절이지. 그렇지만 방황도 이쯤에서 끝내는게 좋아.
- 새로 시작하는 것도 제 의지보다는 떠밀려 하는 것 같아서요.
- 아무도 네 옷에 단추를 대신 끼워 주는 사람은 없어. 어느 쪽이든 가서 남은 단추를 스스로 당당하게 끼워라.
당숙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인 듯 자신의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주었다.
- 여기 명진에 내려왔을 때 줄까 하다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 참아두었던 거다. 물론 그전에도 읽었겠지만.
'아침이었고, 떠오르는 태양이...'로 시작하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었다... 시인은 그 책 몇 구절에 붉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았다. (11쪽)
한 선배로부터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갈매기의 꿈>을 받았었다. 이 책 속의 시인처럼 몇몇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보란 듯이 그은 밑줄이 이 책에서 인용한 부분과 겹친다. 그 밑줄 그은 부분들을 되새김질하듯 읽으면서 대학 시절 먹고 살기 위해 알바로 시간을 떼우던 나날들. 데모대에도 서 봤지만, 사회과학 서클에서도 한동안 활동했지만, 나의 생활고는 해결되지 않았다.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게 문제인,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40년 전에도 지금에도 대개의 사람에게 '같은'시선으로 읽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먹는 게 문제였다.' 정의, 진실.. 그런 거창한 명분과 대의는 나의 월세방에 일원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그 시절 밑줄을 그어 줬던 선배는 현재 서울 도심의 작은 암자에서 주지 스님을 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새벽 편지를 카톡으로 보내주면서 시인의 시심과 성실한 불심을 차곡차곡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마치 이 소설의 서술 화자 '김진호'처럼 말이다.
3. 춘천 = 안개처럼 피어나는 청춘들의 방황처럼 늘 2월과 3월에 머물러 있는 봄 같은 곳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라고 말했던 유안진 시인의 '생명력 넘치는 따뜻한 춘천'을 기대한다면, 독자는 어김없이 실망할 것이다.
오히려 소설 "노르웨이 숲"에 등장하는 청춘의 불안과 첫사랑 등을 대입한다면, 차라리 20대 막 대학생이 되었던 시절의 어설픔이 동시에 떠오를 것이다. 거기에 70년대 중반의 유신정권과 그 종말을 보여 준 우리나라의 특수한 정치상황이 맞물린다면 결코 호락호락한 시절이 아님을 실감할 것이다. 그런 청춘과 그 시절을 상징하는 배경으로 '춘천'이 등장한다는 것은, 꽁꽁 얼어 붙은 겨울도 새로운 기운이 샘솟는 봄도 아닌 '2월과 3월' 그 춥고 어설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라도 같이 자면 은닉이 될 것이고, 언젠가 붙잡히고 나면 저 돈은 도피자금이 될 것이다. 형 때문이었을까, 대단한 용기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돈을 주면서도 길 한가운데 그를 세워두고 돌아서면서도 이 일과 관련하여 앞으로 내가 겪을 일에 대해서는 오히려 담담하게까지 했다. 독서실로 돌아오는 길에도 혼자 물었다. 대체 저 아이의 수배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우리 청춘의 수배는? (325쪽)
우리 청춘의 수배 기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이라 여긴다.
왜냐면, 청춘은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그 시절만의 아름다움이니까. 새싹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마냥 나아갈 수도 없는 아주 짧은 '꽃'의 시절이니까. 더군다나 그 나이가 안고 있는 '뜨거움'이 '부당한 역사'와 맞물렸을 때는. 더욱 더 아픈 상처, 얼룩 등으로 점철될 것이니까. 그렇다고 그 시절을 지나면서 사는 내내 그 시절을 아프게만 추억하지도 않는다.
'꽃'이었던 시절은 어떤 이유로든 '찬란한' 시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