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아 Aug 03. 2023

우연이 주는 선물

언니에게 보내는 스물두 번째 편지

새로움을 만나고 그 새로움이 익숙함이 되어가는 반복적인 과정 속에서, 언니가 만난 티켓 하우스처럼 '우연'스러운 순간을 떠올려 보게 돼. 언니도 어쩌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해외생활에 적지 않게 힘듦을 느껴봤을 텐데, 그래도 꿋꿋하게 루틴을 만들어 가며 나아가려는 모습이 참 언니답고 참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도 언니 일상의 이야기 자주 들려주길 바라 :)


요즘 너무 뜸했지, 미안해. 항상 그래왔던 것 같긴 하지만 요즘따라 내 계획에 없던 일들이 많이 생겨서 마음이 아직까지 붕 떠있는 기분이야. 몸 컨디션은 다행히 괜찮아졌는데, 또다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기니 이제 거기에 또 적응 중이랄까. 정말 하루하루가 내 계획이나 예상했던 시나리오 대로 풀리는 일이 없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내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 브런치를 통해 얘기해 볼게, 일단 지금이 조금 더 적응되고 나면.


한국에서 돌아온 지도 한 달이 지나서 전반적으로는 내 이곳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 요리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나도, 나름 요령 껏 밥상을 차리려고 하고 있고 그 사이 간간히 집 밖에서 누릴 수 있는 경험들과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어.


얼마 전에 남편이랑 뉴욕에 나가서 저녁을 먹고 왔는데 새삼스럽게 남편은 참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단 걸 느꼈어. 우리가 그날 저녁을 먹은 레스토랑 길건너의 모습인데 언니는 이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

나는 보면서, 왼쪽의 오래된 건물은 정말 고풍스러운 반면에 그 옆 층 낮은 건물은 엄청 단순한 게 매우 대조적이라고 생각했어. 잘 보면 오른쪽 건물에는 "Good things to eat!"이라고 적혀 있는데, 포토샵도 아닌 그림판으로 대충 만든 것처럼 보이는 직설적인 쿨함이 옆 건물과 비교했을 때 참 재밌더라고. 재각기 다양한 모습을 껴안고 있는 게 뉴욕이라는 이 도시의 멋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남편한테 저 건물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물으니까, 아무 생각이 안 든다고 하더라. 내가 느꼈던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니까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 저 건물이 고풍스럽다는 생각도 안 해봤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너는 AI가 아니냐고 하고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는데, 거기선 또 다른 얘기였어.


나는 미식가도 아니고 음식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거든. 근데 남편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 음식에는 어떤 재료와 향신료가 들어갔는지 정말 면밀히 파악하고 느끼려고 하더라고. 그에 비해 나는 솔직히 정말 단순하게도 '맛있다' 이상의 평가를 내릴 시도나 그럴 생각조차 안 해봤어. 그렇다 보니 먹는 것 앞에서는 내가 AI가 되는 것 같더라. 내가 내 주변과 세상을 관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음식이 주는 경험의 가치를 아는 남편은 그 찰나의 순간을 오감으로 느끼고 있었던 거지.


한때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내가 세상을 보는 것처럼 비슷하게 느끼고 생각할 거라 믿었어. 하지만 이제는 세상은 보고 받아들이는 개개인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걸 알아.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지금 내 인생의 숙제들도 조금 더 넓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취향을 더 명확히 하고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선 남편처럼 무던해질 필요도 있단 것도 느끼고 있고. 이 글을 적는 이 순간마저도 정말 깊게 느끼고 세심한 생각을 하는 나라는 걸 깨닫고 있지만, 이 모습도 잘 다듬어서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와 나만의 강점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


얼마 전에 지하철역에서 신기한 동상들이 있길래 얼른 사진을 찍었어. 저 역에서만 보이는 동상이라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곤 생각을 했었는데, 알 수 없는 체로 남겨뒀었지.  근데 너무 신기한 게 어느 상점에서 우연히 집은 책을 넘겨보다 그 동상에 대해 찾을 수 있었어. 내가 뉴욕 도심 예술 책 속 정확히 저 페이지를 우연적으로 펼치지 않았더라면 저 동상이 누군가의 작품인지도 모른 체 내 기억 속에서 잊혔겠지.

14 St-8 Ave 역에서만 볼 수 있는 예술작품

계획대로만 흘러가면 이런 선물 같은 순간도 없었을 거야. 그게 우연히 만난 귀여운 동상이건, 길건너의 건물이건 혹은 음식이 되었건 말이야. 브런치를 몇 달째 적으면서 쓸거리를 정하지 못해 한참을 컴퓨터를 켠 체 앉아있는 날들도 있어. 계획대로만 적은 브런치라면 분명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글이 아닌 보기 좋게 짜인 하루 일과표였을 텐데, 맞아 그건 좀 무미건조했을 거야.


하루를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살아보려고!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무슨 일이던 분명히 그 속엔 어제와는 다름이 있을 테니 일상 속 우연이 주는 선물을 놓치지 말아 볼게.


새로움과 익숙함 그리고 우연이 쌓이는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티켓 하우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