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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Sep 28. 2023

명절해방

일상

스물다섯 살 앳된 새댁이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어 환갑을 맞이할 때까지 엄마는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1년에 두 번있는 설날과 추석이 엄마를 짓눌렀다.


큰고모, 작은 고모, 아빠, 그리고 작은 아빠까지 4남매를 둔 할머니는 큰 고모부, 작은 고모부, 엄마, 작은엄마 4명을 전부 다 미워했다. 네 사람을 전부 다 미워했으니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할머니문제가 있었을 터이다.


큰 고모부는 본인 딸을 맞벌이하게 해서 미워했고, 작은 고모부는 사업병에 걸려서 사에 일만 벌인다고 미워했다. 엄마는 고등학교 밖에 안 나와서 가방끈 짧다고 미워했고, 작은엄마는 싸가지가 없다고 미워했다. 모두 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도 할머니는 네 명을 정말로 미워했다.


4형제의 대처방법은 다 달랐다. 큰고모는 주말부부로 살며 큰 고모부와 떨어져 지냈다. 작은 고모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가 장례식에서 딱 한번 보았다. 작은 아빠는 아예 작은엄마와 본인 자식들을 동반하지 않고 본인만 친가에 방문했다.


문제는 아빠였다. 다른 형제들은 명절에 배우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데, 아빠는 깡촌 할머니댁에 온 식구를 다글다글 데리고 다녔다. 교통이 막힌다며 명절연휴 전날 밤부터 시골집에 내려가 명절연휴 내내 엄마를 그곳에 버려두었다. 아무도 부엌일을 할 사람이 없으니 장남의 책임감을 앞세워 엄마에게 모든 것을 견디라고 강요했다.


다정한 사람이었다면 결코 그럴 수 없었을 테다. 할머니는 엄마를 정말로 미워했다. 절대미움의 대상이 되어 시댁이라는 곳에서 혼자 시간을 견뎌야 했을 엄마가 너무나 가여웠다. 엄마가 존중받지 못하는 곳은 나도 싫었다. 사춘기가 되어 시골 가기 싫다고 대거리를 했다가 아빠한테 죽어라고 맞던 날 엄마가 더 가여웠다.


부모도 모르는 새끼는 사람도 아니다



아빠에게 일 년에 두 번 자신의 엄마를 찾아가는 행위는 숙명이었다. 사람으로서의 기본도리를 위해 자신이 이룬 가정의 안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때는 다 그런 줄 알았다. 조부모를 찾아뵙는 것은 당연하다고만 여겼다. 며느리는 그래야 하고,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이라 부르던 시대였다.



작자미상, 인터넷 짤


작자미상, 천년의 사랑도 식는다는 전설의 사진. 인터넷 짤




세상이 엄청나게 변했다. 진짜 조상덕 본 집은 해외여행 가고, 조상 덕이라고는 본 적 없는 집구석은 음식상에 대고 절한다는 자조와 분노 섞인 말이 엄청난 공감을 받으며 재생산이 되던 때, 우리 집에도 뒤늦게 반응이 왔다.


이제는 시엄마가 두렵지 않게 된 나이 먹은 며느리는 갱년기를 거치며 허울뿐인 남편의 실체를 박살 내기 시작했다. 진짜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방치하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울부짖었다. 이혼 따위 뭐가 두렵냐며 구닥다리 가부장제 맞서 싸웠다.


할머니도 그동안 늙었다. 오락가락 정신을 놓던 할머니는 결국 중증치매로 본인이 지극히 아끼던 4형제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할머니를 돌보던 큰고모가 도저히 치매노인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되어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신다고 결정을 내렸다. 사실, 할머니의 치매보다는 큰 고모부의 정년퇴직 때문임을 다 알고 있었다. 할머니와는 한 집에 절대로 같이 살 수 없다는 큰 고모부의 강력한 요청을 큰고모가 결국 받아들인 것이다. 큰 고모부는 할머니가 떠난 후에야 본인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후로 몇 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엄마는 지독한 시집살이를 벗어나게 되었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세월이라 엄마는 시댁 없는 명절이 실감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 늙어서야 본인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강제 주입된 아빠는 못 들은 체하며 슬쩍 자리를 뜬다.


이번 추석은 엄마의 첫 번째 명절이다.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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