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은 참 다사다난한 곳이라 퇴사자, 휴직자, 복직자, 명퇴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 덕분에 계약직도 매우 많았고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M과 나는 같은 부서에서 5개월을 같이 근무했다. 5개월 동안 정말 엄청나게 친해졌다. 12개월의 근로계약으로 채용되었던 M은 두 달 먼저 퇴직하게 되었다. 근로계약에 정규직원이 복직하면 자동으로 퇴직한다는 조항이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둔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M에게는 회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업무가 분장되었다. 순환 보직하는 직장이라 1년간 업무가 분장되는데 정규직원이 다 하기 싫다고 거절한 자리에 M이 끼워 넣어졌다. 중요하지만 한번 익혀두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M은 그러려니 하고 업무분장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정규직원들이 하기 싫다고 떠넘기는 모든 일은 다 M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정규직원들은 입사 때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정규직을 보장받았다. 근태가 아무리 태만해도 자기들끼리는 적당히 눈감아주고 선후배 관계로 똘똘 뭉쳤으며 결국 관리자도 정규직원 편이었다. 취업난이 가속화되면서 신규 입사가 거의 없어지고(신입 공채는 5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기존 직원들끼리만 파견-순회로 조직이 운영되면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규 입사자에게 떠맡기고 싶은 귀찮고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은 그대로인데 신규가 없었다. 새로 전입 오는 정규직원은 죄다 20년 차의 고경력들 뿐이다 보니 계약직원들에게 맡겨지는 일의 강도가 점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쌓여버렸다.
20년 차쯤 되는 선임은 일을 안 하려고 했다. 가능한 적은 업무를 받으려고 했고, 업무분장 협의회 때는 일단 무조건 일을 못한다고 배 째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점점 회사의 필수업무가 비정규직인 계약직원에게 넘어 왔다.계약직원들은 대부분 20-30대로 젊고, 일을 많이 해서 경력을 쌓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심한 일, 험한 일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은 이후에 경력 이직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군말 없이 업무를 받아들이는 것도 계약직원들에게 부당한 업무가 쏠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M도 그런 처지였다. 처음의 업무분장과는 거리가 먼 일까지도 어느샌가 다 본인의 일로 넘어온 것을 깨달았으나, 한번 넘어온 일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래도 이 어려운 취업난에 1년간의 직장도 어디냐 했지만, 전임자의 복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전임자는 M에게 업무분장된 일 중에 가장 책임이 따르는 큰 업무가 끝나자마자 바로 복직 희망원을 냈다. 정규직원의 복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근로계약의 변경을 수수방관하는 관리자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해주는 정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직장도 1년간 매일 바쁜 일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업무가 계약 중간에 완료가 된다고 해도 그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모른척하는 것은 참 치사한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M에게 당신 덕분에 업무가 된다고 하던 사람들조차 모른척했다.
1년간의 근로계약은 계약자의 신분을 보장해 주기에 역부족이었다. 오로지 회사 입장만을 고려한 근로계약이었다. 계약자는 퇴직 의사를 한 달 전에 알려야 하는 의무조항이 있는 반면, 복직자의 복직 개시는 즉각 이었다. 1년간 휴직을 할 만큼의 사정은 업무를 가려가며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모양이었다.
1년간의 치료를 요한다던 전임자는 누구보다 쌩쌩한 모습으로 복직 희망서를 제출하러 왔다. 그리고 1주일 후 바로 복직해버렸다. 그전까지 M에게 주어졌던 모든 일들은 죄다 갈 곳을 잃었다. 복직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M은 딱 그 프로젝트에 한시적으로 고용되었던 사람처럼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 M에게 분장되어있던 모든 업무에 대해 복직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런 것까지 본인이 직접 해야 하냐고 소리 한번 콱 지르면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복직자는 29년차로 관리자보다도 입사선배였다.) 갑작스럽게 M이 퇴사하고, 복직자는 일을 안 했다. 일 년간 가장 큰일을 다 끝냈는데 아직도 뭐가 불만이냐고 오히려 복직자는 역정을 내었다.
M의 편을 들어 부당한 계약 파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은 오로지 계약직원들 뿐이었다. 중요 업무가 끝났다고 정규직원 복직을 바로 허가하는 관리자에게 따져 물어줄 수 있는 것은 그중에서도 소수였다. 다들 재계약 걱정에 침묵했다. 나는 달랐다. 이미 그 직장의 부조리함을 더 처절하게 느끼던 중이라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나뿐이었다. 재계약을 해달라고 해도 거절할 각오를 했기에 가능했다. 나 역시 계약직이 감당할 수 없는 업무범위에 고통받고 있는 처지라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내가 그만두면 회사가 더 큰일인 상황이었다.
M의 입장에 분개하며 함께 나설 수 있었던 까닭은 나 역시 언제라도 같은 일을 겪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너희가 잃을 것은 오로지 쇠사슬이요, 너희가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그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음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21세기 한복판인 지금 다시 그 구절을 되뇌어보는 것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노동자의 연대가 사회변화를 이끌 수 있다. 노동자는 노동자가 지지하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북한에서는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M은 엄청난 프로젝트를 마친 경력을 발판으로 3개월 후 다른 회사에 이직했다. 참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