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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Nov 03. 2020

나의 워킹맘 선배, 엄마

워킹맘 29

부모님 시절에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편 이름으로 집을 사고 남편 이름으로 된 통장을 관리하며 살았다. 가장으로써의 남편의 지위는 높았고, 아내는 집안에서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관리하며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다. 여성은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시부모 입장에서는 내 아들이 힘들게 벌어오는 돈을 편하게 쓰기만 하는 며느리가 못마땅한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생생하게 살아있던 곳에서 엄마의 투쟁을 보고 컸다. 엄마는 동생이 초등학교에 다닌 후부터 꾸준히 일을 했다. 아빠는 엄마의 일을 하찮게 여겼다. 어디 애엄마가 출퇴근한답시고 애들을 방치하냐는 호통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아빠는 엄마의 일을 항상 알바 취급했고 걸핏하면 때려치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빠가 엄마에게 매달 주는 생활비는 몇 년이 지나도 똑같았다. 물가는 매년 오르고, 월급도 물가상승분에 맞춰 인상이 되는데 엄마의 생활비는 항상 그대로였다. 엄마는 본인 옷은 안 사 입어도 나와 내 동생은 계절마다 새 옷을 사 입혔다. 나와 내 동생이 점점 자라서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엄마 풀타임 직장에 취업했다. 그래도 항상 엄마의 일은 대접받지 못했다. 아빠는 같은 직장인이 된 엄마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아빠는 주말에 늦잠을 자고 텔레비전을 봤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엄마는 아침밥을 해야 했고 밀린 빨래를 해야 했으며 아빠의 셔츠 자식들 교복까지 다려야 했다.


내 동생까지 대학생이 된 이후에 엄마는 꿈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대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처럼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았던 시절이라 여상을 나온 엄마는 바로 회사에 취업해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계기로 퇴사했다. 똑똑한 학생이 여상에 진학하던 때라 대학에 가지 못한 게 속상하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사회가 달라져서 그런지 대학에 못 간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엄마가 40대에 취업을 하려고 보니 15년 전의 사회생활을 경력으로 쳐 주는 곳도 없고, 여상이라는 학력이 벽으로 느껴졌다 했다. 남들 다 간다는 대학이니 나도 가보고 싶다는 엄마의 소망에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는 손이 컸다. 부침개를 부치는 날이면 옆집 아랫집 윗집으로 부침개를 나르는 건 내 몫이었다. 아파트에 살았지만 손이 큰 엄마 덕에 이웃들 얼굴을 다 알았었다. 나이가 들면 귀농해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게 엄마의 오랜 꿈이었다. 엄마는 본인의 성격에 맞게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해서 사이버대학교에 신입학했다. 엄마는 누군가 최종학력을 물어보면 더 이상 고졸이라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했다. 주경야독이 일상이 되었다. 더 이상 엄마의 손길이 필요 없을 만큼 성장한 나와 내 동생은 대학 신입생이 된 엄마의 과제와 시험공부를 도와주었다.


엄마는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공부를 하면서 인간 행동과 사회현상이라는 과목을 제일 좋아했다. 이걸 미리 알았더라면 너와 동생을 키울 때 조금 덜 힘들었을 거라 말하곤 했다. 인간의 행동이 이론으로 정립될 만큼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교육학, 사회학, 복지학을 배우면서 엄마는 늘 즐거워했다. 가족 모두를 긴장하게 했던 졸업시험까지 번에 통과했다. 4년간의 공부를 끝내고 무사히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한 엄마는 성공적으로 취업까지 다. 더 이상 아빠는 엄마의 일을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여자는 꼭 일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바로 재취업을 했다고 했을 때 가장 기뻐한 건 엄마였다. 본인이 아이를 낳고 집에 갇혀있었던 것처럼 딸도 사회생활을 끝내게 될까 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워킹맘이 된 것은 엄마 딸일 때부터 정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의 일이 늘 자랑스러웠다. 내 아이도 일하는 엄마가 자랑스러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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