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써'버리겠어

직장

by 나브랭

정말이지 싫은 사람이 있다. 지금껏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그중에서도 K부장은 얼굴도 보기 싫은 사람으로는 손에 꼽을 수 있을만했다. K부장은 유난히 목청이 컸다. 별것 아닌 일에도 언성을 높이면서 '요즘 것들은 나약해 빠졌어'따위의 말을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내뱉는 꼰대 중에 왕꼰대였다. K부장이 술을 마시는지, K부장이 술에 담가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술만 마시면 끔찍한 주사를 부려대는 걸로도 유명했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K부장을 만나면서 꼬였다. K부장은 술 이외의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신입인 나에게 제대로 된 업무분장을 해줬을 리가 만무했다. 전임자가 도망치듯 떠나버린 상황에서 이루어진 부서 배정이라 신입에게 말도 안 되는 양의 업무를 미뤄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임자의 부재 속에서 사수 한 명과 새파란 왕초짜 신입 둘이서 4명의 업무를 해야 했다. K부장은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라 사회생활 경력이 전무한 내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존재였다. 그나마 술 다음으로 잘하는 게 사내정치라서 용케 부장까지 달고 있다는 게 모든 이의 공통된 평가였다.


K부장이 나와 내 사수를 너무나 믿고 전권을 맡겨버린 까닭에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해야 했다. 월 마감, 분기 마감, 반기 마감, 연마감이 숨 가쁘게 진행되었고 나는 대단히 훌륭한 인재로 성장해버렸다. 고작 1년 만에 업무의 시작과 끝을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밑바닥부터 기본기를 충실히 다질 수 있었다. 그다음 해에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원하는 업무를 우선 선택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릴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니 K부장은 부하직원을 성장시키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몇 년도 더 지난 K부장의 일을 이제야 쓰는 까닭은 며칠 전 K부장의 근황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추접스러운 술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다른 부서의 여직원을 성추행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했다. 모든 직원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K부장의 퇴직을 기대했건만, 그는 용케도 몇 개월의 대기발령 끝에 자회사로 전보발령이 되었다고 했다. 역시 사내정치의 달인다운 놀라운 처세였다.


워킹맘이 되고 나서 매일 짤막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달라진 점은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분노를 유지하면서도 나의 우아함을 잃지 않는 것이 긍정적인 변화였다. 불쾌한 사람을 만나면 너를 들이받아 '쏴'버리는 게 아니라 '써'버리면 되는 것이다. K부장처럼 별난 인간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좀 더 덤덤하게 그를 '써'버리겠다.


새로이 K부장을 만나게 될 모든 이에게 나의 다정한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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