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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Nov 06. 2020

다정한 오지라퍼

워킹맘 33

직장인으로서 믿는 구석은 퇴직금과 실업급여 뿐이다. 내가 출산으로 퇴사를 결정하게 되는 상황에 처해보니 부당해고라든지 회사의 복지제도 같은 건 관심이 없어졌다.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번뇌를 겪고 난 다음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 퇴사 희망원에 서명을 하게 된다. 퇴사하는 마당에 회사에 대한 불만이 더 이상 남아있지도 않을뿐더러, 회사에서도 나가는 사람에게 깔끔한 이별을 원하기 때문에 할 말만 할 뿐, 추가적인 사항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나도 그랬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인생의 큰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내느라 퇴사처리라는 일련의 형식적인 과정의 중요성은 희미해졌다. 퇴직 의사를 밝히고 잔여 연차를 소진하는 것으로 퇴사가 결정되었다. 나는 1년 단위의 고용계약으로 정해진 기간이 있는 노동자라 퇴직절차는 간단했다. 계약 종료일이 바로 퇴직일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기존 근로계약의 종료 후 새로운 고용계약에 동의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내가 퇴직 의사를 밝혔으므로 퇴직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긴 하지만, 업계의 관행상 출산 이후까지 계약이 연장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계약직원에게도 출산휴가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왕이면 회사와 좋게 끝내고 싶었다. 임산부가 되니 쉽게 피로해져서 매사에 날 세우면서 지내고 싶지 않았음이 주된 이유였다. 사실 이렇게 될 상황임을 알았기에 출산이 계약 만료 시점 이후가 되도록 계획임신을 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래도 아쉬웠다. 산전 후 휴가 기간과 계약 만료의 시점이 비슷한 경우라, 사측에서 재계약을 거부하면 깔끔하게 퇴사하면 끝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재계약에 서명하는데 나만 해고 예정인 기분은 꽤나 비참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때문에 내 삶이 바뀌는 경험의 시작이었다. 아이를 키우고 난 후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해도 된다지만 그때가 언제일지 기약이 없는 게 문제였다. 육아에 끝이 없는데 언제부터는 엄마가 일해도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는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자를 다시 불러줄까. 나는 너무 두려웠다.


퇴사 다음날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서류 미비로 몇 번을 다시 발걸음을 하고 난 후에야 구직급여 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고용센터에서도 몇 번을 망설였고 두려웠다. 코로나 시국의 고용센터는 너무나 바빴고, 기대했던 취업상담은 없었다.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터라 고용센터의 담당자와 전화연결조차 어려웠다. 하필이면 이런 시국에 퇴사를 해서 얼떨떨했다. 나만 빼고 세상이 바쁘게 흘러가서 생뚱맞은 느낌뿐이었다. 경력단절에 대한 불안감과 퇴사로 인한 스트레스, 육아로 인한 피로가 한데 섞여 괴로웠다. 매일매일이 무의미하고 스쳐 지나가는데 나만 시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퇴사도 상황에 휩쓸려 진행되었는데, 얼떨결에 재취업을 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다. 시어머니의 직장이 코로나의 대 혼란 속에서 폐업했고, 퇴사한 김에 시어머니가 아예 육아를 전담해주시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내가 재취업시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시어머니의 나이가 있으니 재취업이 무리였고, 그렇다고 아이 하나에 어른 두 명이 붙어서 돌보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시어머니는 좋으신 분이긴 했지만, 하루 종일 집안에서 아이 양육을 함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일들이 겹쳐 젊은 내가 재취업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경력을 살려 같은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경력단절 기간이랄 것도 없는 시간이라 퇴사 후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도 가족일을 도왔다는 답변으로 무난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게 장점이었다. (출산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 지 딱 120일 되는 날 다시 출근했다. 모든 것이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 매 순간의 선택에서 조언을 얻고 싶었다. 재취업한 회사에서 임신한 직원을 만났을 때 꼭 아는 척을 하고 싶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당신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꼭 전하고 싶다. 나는 어려서부터 오지랖이 넓어서 온 동네에 다 참견하길 좋아했다. 타고나길 이러니 이왕이면 다정한 오지라퍼가 되어야겠다. 힘들고 지친 임산부 직장인과 워킹맘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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