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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Nov 30. 2020

욕이 배를 뚫고 들어오지 않아

워킹맘

작년 7월 임신을 확인했다.


워킹맘의 시작은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8월 초 휴가기간이 끝나고 임신확인서까지 받은 후에 회사에 임신을 알렸다. 계약직 직원이 임신한 것도 처음이라 했고, 임신 전기간 단축근무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관리자는 꽤나 난감해했다. 제도는 있지만 정말 매일 사용할 것이냐는 면담이 이어졌다. 회사엔 휴게공간이 전혀 없었다. 대안으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근무 중 휴게시간을 사용하겠다고 했고, 내가 요청하면 하루 2시간 언제든 쉴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지연 출근과 조기퇴근이 가능한 날에는 최대한 활용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외출로 합의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기존 직원들의 눈초리였다. 일개 계약직 직원이 임신했다는 것을 이유로 단축근무를 요청하는 게 대단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었다. 나 때는 말이야 그런 건 상상도 못 했다부터 요즘 것들은 참으로 당돌하다는 말, 어차피 계약직이라 막 나간다는 뒷담화가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부장과 관리자의 사정과는 별개로 대표는 적극적으로 제도를 활용하기를 요청했다. 그동안에는 제도가 없어서 못 했을 뿐이며 바뀐 제도는 나서서 활용해야 직장에서도 당연하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대표의 부인이 유산을 겪고 난 후에 다시 임신이 되지 않아 셋째를 포기하게 되었다고 했다. 초기 임신이라 조심하라는 격려였다.


그전까지 담당하고 있던 업무에 관해서는 야근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그것만으로도 확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처음 변화를 시작하는 사람이 용기를 낸다면 바뀔 수 있다. 언제라도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일 수도 있음을 알고 배려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직장 스트레스가 하도 극심하여 입덧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면 다소 과장일까. 여름휴가기간 직후 회사에서 이어지는 면담 속에서도 입덧으로 인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점심시간에는 아무것도 못하고 쉬어야 했고, 물만 마셔도 속이 울렁거렸다. 이때 나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알아차릴 정도였는데, 냉장고를 열면 그 속에 들어있는 모든 재료의 냄새가 느껴져서 냉장고는 아예 열지도 않았다. 남편이 냉장고를 열면 방안에서도 냉장고 냄새가 느껴져서 울렁거렸다.


임신 중에는 막 먹고 싶은 것이 생긴다는데 나의 경우는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만 입덧 기간 중에 맡았던 오리고기의 냄새가 너무나도 싫어져서 입덧이 지나간 후에도 오리는 생각만 해도 싫었다. 오리고기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닭고기도 이상하게 싫어져서 치킨도 안 먹게 되었다. 회사 식당에 빠지지 않고 매번 나오는 메뉴가 닭고기인 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독히도 회사생활이 힘에 드는 사람이었나 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장의 배려는 컸다. 9월 초 국내 출장이 잡히게 되어 임신으로 인해 출장 대체를 요청하였는데, 사장은 오히려 부서 전환까지 제안했다. 지금껏 임신 중 단축근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루틴 하게 체크해야 하는 업무 때문이었는데 아예 그런 부담이 없는 자리로 옮기고 단축근무를 편히 활용하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추가 수당과 성과급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었지만, 먼저 고민하고 나를 배려해주고 있음에 감사하며 수락했다. 다만 쉽지 않은 일이기에 만약 후임자가 나타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하며, 출장 대체만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문제는 후임을 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었다. 관리자는 당장 어떻게 후임을 구하냐고 난리가 났다. 단축근무까지 해주는데 뭐가 더 필요하냐는 관리자와의 면담이 이어졌다. 반면에 부장은 임신 중 단축근무로 인해 심기가 대단히 불편했기 때문에 짐 덩어리 대신에 온전히 제 몫을 할 수 있는 부서원을 은근히 바라는 상황이었다. 타 부서 사람들이 줄줄이 면담에 들어갔고, 누가 봐도 나와 자리를 바꿔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모두에게 이유가 있었다. 정직원들은 어떻게든 교체를 거부했고, 후임으로 지목된 이는 나보다 나이가 8살 많은 미혼의 계약직 여직원이었다. 나와 관계가 딱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후임으로 본인이 거론되자 직원들에게 내 비난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예 대놓고 들으라고 욕하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내 입장에서는 그냥 출장만 대체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부서에서는 나를 대놓고 짐 덩어리로 여기는 상황이었고, 여기저기서 욕을 하도 배부르게 먹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했다. 남편이 진심으로 너도 그냥 그만두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그즈음 보건소에서 실시한 산전 우울증 검사에서 고위험군으로 나와서 지역 정신보건센터에서 전화로 관리를 받았다. 나는 아예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났다. 각자 맡았던 일에서 자잘한 업무를 하나씩 떼어내어 만들어낸 자리였기 때문에, 새 부서 사람들은 나의 전입이 딱히 불쾌할 것이 없었다. 앉아서 서류 작업만 하면 되는 업무가 주어졌고, 누가 봐도 황송스러운 일이었다. 새 부장은 건강하게 출산하라는 덕담을 건네는 것으로 전입이 끝났다. 이쯤 되니 회사에서 같이 밥을 먹어주는 동료도 없이 철저히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온갖 험담에 앞담화까지 들으라고 대놓고 욕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그냥 귀를 닫고 살아버렸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어 버린 이후에 혼자 벌어야 하는 남편을 생각해서라도 회사에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버티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부서 이동하는 날이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기분이 좋지는 않다고 말하는 그 여직원을 보며 정신이 아득했다. 인수인계하는 나에게 당신에게서는 어떠한 말도 듣고 싶지 않으니 자신이 부장에게 직접 인수인계를 받겠다고 말하며 진심으로 벌레 보듯 하던 그 사람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같아서는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지금 뭐라고 말했냐고 대거리를 한판 대차게 하며 배를 붙잡고 쓰러지는 연기라도 해볼 걸 싶은데, 임산부는 스스로가 약자가 되는지라 아무 말도 못 했다. 차라리 그때 뭐라고 하는 거냐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이틀 정도 결근하는 깡다구라도 부렸으면 후회는 없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와중에 아기는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말은 귓등으로 흘려가며 회사에 다녔다. 욕이 배를 뚫고 들어오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뭐라 하거나 말거나 나는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서 지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출퇴근을 했고, 단축근무를 사용하면서 몸도 한결 편안해졌다. 임산부 근로자가 이토록 환영받지 못하는데 앞으로의 리얼 워킹맘 생활이 어떨지 앞날이 뻔히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임신 중 근무하던 회사에서는 계약 만료로 퇴사하였다. 계약직원의 임신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출산 후 복직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직문화였다. 사회적으로 저출산에 대해 배려하는 문화가 있고, 정책적으로도 혜택이 많아져서 그래도 수월하게 임신 중 근로를 할 수 있었다. 좀 더 일가족 양립에 관한 사회정책적 합의가 모인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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