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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Nov 27. 2020

셀프감금(feat. 코로나)

워킹맘

2020년 2월부터 전 세계를 휩쓸어버린 코로나바이러스가 이토록 지속될 줄 몰랐다. 임신부터 출산, 그리고 육아까지 코로나가 엄청나게 삶을 바꾸었다.




2월이었다. 출근만 안 하면 꿀일 줄 알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셀프감금의 시작은 사실 반가웠다. 코로나 예방을 위한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기저질환자와 임산부는 우선적으로 재택근무를 실시하게 되었다.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임신 말기로 가면서 가뜩이나 몸이 무거워 출퇴근이 어려웠는데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내심 기쁘기도 했다. 임신 33주 이후 9개월 차에 접어드니 운전할 때 핸들에 배가 닿아서 여러모로 불편했 참이었다.


재택근무하면서 좀 여유를 부려볼까 했는데, 국내에 확진환자가 발생하면서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 확진환자가 돌아다녔다는 정보가 공개되자 꼼짝도 못 하고 집에만 있게 되었다.  처음 재택근무를 시작하게 되면서 이번 기회에 집에서 출산 가방도 준비하고 아기 빨래도 미리미리 준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자발적으로 안 나가는 것과 못 나가는 것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사람이 모이는 곳 자체를 조심하게 되는 상황이라, 임산부 요가 수업을 들으러 나가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장보기는 배달로 대체했다. 다른 건 어찌 대체할 수 있었지만 미리 신청해 두었던 산부인과 문화센터 강좌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취소되어 안타까웠다. 아쉬운 대로 짐볼을 구입하여 야매 홈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유튜브에서 그날그날 임산부 요가 같은 키워드를 입력하여 마음에 드는 영상을 보고 대충 흉내만 내었다.


임산부 독감에 걸리면 약을 제대로 쓸 수 없데, 코로나는  치료방법도 모르는 새로운 병이라 더 걱정이었다. 남편은 더 유난이라 아예 집 밖을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지금껏 스스로를 집순이라고 생각했는데, 집에만 있으려니 괴로웠다. 재택근무를 마지막으로 퇴사했다. 정말로 집에서 쉬어볼까 했는데 딱 이틀 후에 출산을 했다. 37주 1일이었다. 초산임에도 상당히 빠른 출산이어서 당황했다. 엄마 쉬는 꼴을 못 보려고 그런가 하는 우스갯소리는 마냥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3월이었다. 근처의 종합병원에서 코로나 집단감염이 발생하고 난 후로 다니던 산부인과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분만 당일에야 남편이 보호복을 입고 가족분만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가족분만실이라고 해봤자 보호자 1인만 들어올 수 있어서 남편 이외에는 아무도 올 수 없었다. 진통 끝에 아이를 낳았다. 남편이 탯줄을 자랐다. 간호사가 남편 앞에서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 개수를 세어주더니 이제 나가라고 했다. 코로나 시국의 출산은 산모 혼자 감당하는 일이었다.


자연분만 후 3박 4일의 입원 동안 누구도 면회 올 수 없었다. 남편은 출산 직후 아기를 잠깐 본 게 다였다. 친정식구도 시댁 식구도 지인도 아무도 방문할 수 없었다. 오롯이 혼자 있었다. 어차피 아무도 못 오는데 비싼 일인실에 있을 이유도 없어 5인실에 있었다. 퇴원수속을 하며 출산비용을 보니 9만 원이 나왔다. 코로나 덕분이었다.


조리원에서도 혼자였다. 코로나 걱정에 조리원을 가야 할지 끝까지 고민했었지만, 집에서는 더 엄두가 안 나서 조리원으로 갔다. 보름 동안 철저히 혼자였다. 코로나 시국이라 조리원에서는 남편의 동반을 금지했다. 다른 방 산모들과 어울리기도 어려웠다. 혹시나 밀접 접촉을 했다가 코로나에 감염되면 더 큰일이라 몸을 사려야 했다.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혼자 있었다.


사실 좋았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챙겨야 하는데 아예 아무도 못 오는 상황이 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병원에서, 조리원에서 챙겨주는 밥을 먹으며 혼자 푹 쉬었다. 아기는 전문가들이 잘 봐주니 나 혼자 푹 쉬기만 할 수 있었다. 코로나 덕분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손님 걱정 없이 전화로 우아하게 안부를 전하고 늘어지게 쉬었다.





4월이었다. 코로나는 계속해서 기승을 부렸고, 시어머니가 근무하던 회사는 폐업했다. 갑작스러운 시어머니의 실직은 내 산후회복과 신생아 돌봄에 도움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매일같이 아이를 돌봐주었다.


5월이었다. 시어머니가 매일 아기를 돌봐 주시는 것은 너무나 감사했으나 아이 하나에 어른 둘이 하루 종일 붙어있다 보니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6월이었다. 나이 든 시어머니가 다시 취업해봤자 식당 설거지나 청소일 이다.


7월이었다. 내가 경력을 살려 취업에 나섰다. 남편에게는 미리 상의하지 않았다. 집에서 아기나 잘 키우라고 잔소리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아이 양육 계획 전체를 바꿨다. 열심히 취업 면접을 보러 다녔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을 하면 다 떨어졌다. 2월에 퇴사하고 지금껏 뭐했냐는 질문에 가족일을 도왔다는 그럴듯한 말을 지어냈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8월에 다시 취업했다. 몇 번의 구직 면접에 떨어지고 겨우 최종 합격했다. 가장 좋은 조건의 회사에 합격했기에 이전 탈락의 아쉬움은 하나도 없었다.


9월에는 부서변경이 있었다. 하반기 인사이동에 맞춰 새 업무분장이 이뤄졌다. 꿀보직에서 힘든 부서로 이동했다. 아쉬웠다. 경력직이라 인사이동에서 고려했다고 했다. 하반기 인사이동 때문에 경력직으로 채용했었나 싶었다.


10월에는 추석이 있었다. 코로나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어린 아기를 데리고 차로 오래 이동할 수도 없어서 가까운 거리의 친정과 시댁에만 방문했다. 친정이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11월이었다. 코로나는 더 확산되었다. 지역감염사태로 심각해진 코로나로 인해 집-회사 이외의 장소를 갈 수가 없었다. 가장 무서운 건 동선 공개였다. 코로나에 걸리면 회사부터 시작해서 모든 행동에 대해 손가락질받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내년 근로계약을 앞두고 있는 계약직인 나로서는 코로나에 걸리면 직장도 잃게 될 것이 두려웠다. 코로나에 걸려서 건강이 상한 것보다 회사에서 잘리게 될 것이 두려웠다. 동네에 동선이 공개되고 회사에서는 확진자로 눈총 받게 되는 게 무서웠다. 아마 코로나에 걸리면 당장 해고될 처지였다. 코로나에 일부러 걸리는 것도 아닐 텐데 비난받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집-회사 이외의 동선을 극도로 피하게 되었다. 코로나에 걸려서도 직장에서 잘릴 걱정을 하지않아도 괜찮을 사람은 공무원 말고는 없을 터였다.


옆 회사 건물에 확진자가 나왔는데 건물 소독과 전 직원 코로나 검사비용이 수천만 원이라는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아무래도 확진자는 코로나가 다 치료되고 나서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덜컹했다. 혹시나 마주치진 않았을까 두려웠다. 집-회사만을 다니는 생활이었지만, 접촉자가 항상 있으니 그들은 괜찮은지 항상 의심부터 하게 되었다. 머리손질을 위해 미용실을 가야하는데 계속 미루고 있었다. 괜히 미용실에서 코로나에 감염되면 이시국에 한가하게 미용실이나 다닌다고 비난받을까 두려웠다. 산후탈모로 흉한 몰골을 다듬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산후다이어트를 위해 필라테스에 등록해두었는데 회원권 만기가 다 되도록 가지를 못했다. 필라테스센터에서는 환기와 방역수칙을 준수하고 있으니 회원권 연장은 안된다고 했다. 코로나시국에 필라테스센터도 환불을 해줄 상황이 아닌듯했다. 결국 내가 손해를 껴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코로나집단감염을 보며 내 선택이 옳았다는 씁쓸함이 남았다.


내가 까발려질까봐 너무나 두렵다. 처음에는 확진자 동선을 보고 누군가를 비난하기도 했었다. 이제는 그럴수가 없다. 그들도 정말 어쩔 수 없었음을 안다. 언제라도 걸릴수 있음을 알기에 더 움츠릴 수밖에 없다.






12월에는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일단 12월 첫째 주는 전원 재택근무로 정해졌다. 임원 자녀가 수험생이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수험생 학부모의 마음으로 코로나 예방을 위해 힘써달라는 발표에 씁쓸하다. 내 자식에게 괜히 미안하다. 코로나 덕분에 올 한 해가 바쁘게 흘러간다. 엄청난 삶의 변화 하나하나에 코로나가 영향을 거대하게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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