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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Nov 27. 2020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워킹맘

회사에서 힘들었던 날이면 집에 곧장 들어가지 않는다. 카페에 들러 제일 비싼 음료를 주문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 사치를 부린다. 수요일 그런 날이었다. 전임자 없 중간에 덜컥 배정받은 업무는 별 일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일처리가 복잡했다. 심지어 다른 팀 일정까지 물려있는 작업이라 조금만 밀려도 난리가 나는 이 연달아 발생했다. 잘해야 본전, 못하면 욕받이가 되는 회사일을 하면서 초라해졌다.


내 기분을 다 털어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휴식이 필요하다. J임원, K부장의 얼굴을 지워내고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카페 문을 열자마자 훅 들어오는 커피 향에 마음이 벌써 녹는다. 초콜릿 어쩌고 이름도 복잡한 크리스마스 시즌 음료를 주문했다. 아주 연한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과거의 내가 주춤거리며 카드를 내밀었다.


연말이다. 페 한편에는 시즌 음료를 포함해 여러 잔의 음료를 마시면 다이어리를 증정한다는 이벤트 코너가 차려져 있다. 괜히 얼쩡거리며 내년 다이어리를 구경했다. 예쁜 다이어리가 있어봤자 쓰는 건 업무일지뿐이다. 언제부터인가 다이어리에 시들해졌다. 내 개인의 일상을 신나게 적을 일이 언제였는지 아득했다.


월화수목금 회사 업무를 빼곡히 기록하고 나면 토일은 빈칸으로 남는다. 예전에는 토일을 위해 살았던 것도 같다. 금요일 퇴근과 동시에 여행도 가곤 했다. 이제는 그럴 여유조차 없어져버렸다. 워킹맘이 되고 보니 주말에는 밀린 살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커가는 것은 어찌나 놀라운지 뒤집기만 겨우 하던 아기가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의 성장에 놀라워할 겨를도 없이 주말마다 집 청소에 바빴다. 이제는 아기의 손이 닿는 모든 곳을 치워야 했다.


집에는 내 공간이 없다. 아이와 함께 자느라 침대에서 편히 누워 잔 기억도 없어졌다. 신혼살림으로 장만한 넓은 침대에서는 남편 혼자 누워 잔다. 잘 때는 꼭 엄마 옆에 있으려고 하는 아기 덕분에 남편이 밤에 아기를 맡아줄 수도 없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편히 자라고 했던 처음의 배려는 결국 나만 소진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회사에서는 무색무취하게 지냈다. 책상에 개인물품을 올려두지 않았고, 퇴근 때마다 책상을 치웠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니지만 회사에서는 조용히 티 안 나게 존재하고 싶었다. 여러 번의 이직을 하면서 한 사람 들고나는 건 별일도 아님을 알았다. 회사에 필요한 부품을 들이고 교체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었다. 내가 오롯이 나로 존재할 곳은 회사에도 집에도 없었다.


퇴근시간이라 한산해진 회사 근처 카페에서 소파 구석자리를 차지했다. 찻잔에 따끈한 김이 어린 것을 멍하게 쳐다봤다. 요새 불멍이 유행이라더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호로록 마셔봤다. 달고 부드러운 게 목구멍을 훑는다. 구멍까지 솟구쳤던 불만이 녹는다. K부장에게 퍼부어대고 싶던 짜증이다. 자기 일도 아니면서 쉽게 말하는 옆 부서 P에 대한 미움이다. 회사 밖에서 보면 별것도 아닌데 회사 안에서는 왜 그리 힘들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려면 퇴근 후 카페를 올 수 있는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아마 커피값을 벌기 위해 회사에 다니나 보다. 회사는 병 주고 약 주는 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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