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취업을 했을 때에는 회사가 전부였다. 극심한 청년실업 상황에서 가까스로 얻어낸 성과가 뿌듯했다. 남의 돈을 버는 게 신이나서 내 삶의 모든 부분을 회사에 바쳤다. 2년차가 되니 슬슬 꾀가 늘어서 여기저기 딴 짓을 했다.
결혼도 했다. 미혼일때와 신혼일 때는 큰 차이가 없었다. 업무도 똑같았다. 가끔 있는 국내출장과 꽤 자주있는 야근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고작 결혼으로 퇴사하는 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임신은 처음이었고, 무지했다. 업무가 몰리는 시즌이라 피곤한 줄 알았다. 야근을 마치고 난 뒤 이유없는 복통이 느껴지기에 스트레스 증상인 줄로만 알았다. 유산이었다. 아기가 찾아왔던 줄도 모르고 허망하게 보내고야 말았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대단히 유능한 인재라 착각하며 지냈는데, 나 하나 빠진다고 회사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 하나 빠진다고 무너질 회사라면 더 잘못된 상황임에 틀림없다. 무엇을 위해 돈을 벌고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입사하며 작성한 근로계약서를 꺼내 보았다. 간결하고 명확했다. 나는 근로를 제공하고 회사는 급여를 제공한다. 어디에도 내 인생을 갈아넣으라는 요구는 없었다. 회사에 필요한 노동을 제공하면, 그에 따른 대가를 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 뿐이었다.
사회 초년생일때 '주인'의식을 가지고 근무에 임하라는 조언을 듣고 의지를 다지던 시간도 있었다. 회사 일이 나의 일로 착각하며 지낸 적도 있었다. 직급이 권력인 것 마냥 어깨에 힘주고 다닌 일도 있었다. 분에 넘치게 거창한 짓이었다.
매사에 산뜻한 사람이고 싶다. 회사와의 관계도 그렇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8시간을 존재하기로 계약한 관계일 뿐이다.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선 넘지 말자. 회사일과 개인생활의 경계가 불분명할 때마다 나름의 기준을 상기시킨다. 내 인생을 회사에 맡겨두고 살고 싶지는 않다.
2021년이 되었다. 원더키디가 우주를 날아다니는 2020년이 지났는데도 현실감이 아직도 없다. 언제부터였는지 연말의 설렘이 느껴지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카운트다운을 보며 새해의식을 거창하게 하던 날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득하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아득한 경계는 유난히 새삼스럽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기로 했다.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기에 지난 날의 나는 걱정이 너무도 많았다. 산뜻한 사람이 되려면 미련도 후회도 덕지덕지 붙여놓지 말아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