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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Feb 15. 2021

이직

직장

이직을 결심했다. 새 직장에서 고작 7개월뿐이었지만 아니다 싶으면 바로 움직이는 게 현명하다. 몇 번의 이직을 경험하며 터득한 생존 방식이라 바로 결단을 내렸다. 아쉽기는 했다. 집과 가까운 거리에 경력까지 인정받아 입사했었다. 계약 연장까지 논의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하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업무체계의 부실이었다. 업무가 정리가 안되어있어 내 업무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은 계속 몰려드는데, 내 권한 밖의 일까지 내 몫으로 떠념겨오는 것도 한두 번이야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회사의 가장 귀찮고 까다로운 일은 죄다 계약직에게 떠 넘지는 문화도 힘들었다. 10개월 근무자에게 회사의 모든 스케줄 조정을 맡기지를 않나, 7개월 근무자에게 시스템 총책임 관리를 떠넘기는 행태에 질려버렸다. 가장 감사지적을 많이 받는 분야는 아예 계약직원의 몫이었다. 회사의 이전 감사내역을 훑어보니 감사 때마다 실무직원은 계약직 사원이었다. 문제가 지적되면 꼬리 자르기식으로 그 사람만 도려내었다. 사람이 갈려나가도 전체 조직은 평온했다. 어쩌면 실무직원의 문제라며 교묘히 피해 가기도 했었음에 틀림없었다. 부장과 관리자는 이런 상황을 방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고 있었다. 매년 업무분장 때마다 계약직원에게 실무 총책임자를 분장하고 있었다.


몇 번의 문제제기를 했었다. 과한 업무분장과 계약직원의 업무범위를 넘어서는 책임을 거절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내 책임으로 넘겨지는 상황이 두려웠다. 모든 직원들의 불만이 향하는 곳이 내 포지션이었다. 내가 싫은 것이 아니라 업무로 인한 불만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견디기 힘들었다. 내려놓기로 했다. 감당할 수 있는 책임만 지기로 했다.


내가 빠져서 문제가 생긴다면 회사가 잘못된 것이다. 개인의 이동으로 전체 업무가 휘청인다면 관리자의 문제이다. 다년간의 조직생활을 통해 시스템을 익혔다. 개인의 역량보다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것이 회사라는 조직이다. 그것을 알기에 더 힘겨운 직장이었다. 경력직 급구라는 의미에 이런 책임과 무게가 따른 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 불찰이었기도 하다. 면접 후 3일 만에 출근을 요청하는데 전임자가 없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될 지점이었다.


계약 연장과 이직을 저울질하던 중에 먼저 퇴사한 계약직원의 이직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가장 고단한 업무를 맡아 고생했던 A는 정직원의 복직으로 퇴사했다. 복직자는 중간에 업무를 인계받아 작업을 마무리했지만, A가 담당했던 업무 전체를 다루지는 않았다. A는 전천후로 거의 모든 업무를 담당했고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복직자는 딱 그 반의 반만 수행했다. 업무 시즌이 아니기도 했지만, 일도 사람을 가려가며 주어졌다. 문제는 갈 곳을 잃어버린 A의 나머지 일이 나에게 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정직원에게는 어려워서 물어보지 못했던 내용이 그다음으로 만만한 나에게 몰려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서글퍼졌다. 일도 사람을 가려가며 오는구나.  회사에서 사람은 계약직과 정직원으로 나뉘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직을 선택할 수 있었다.


다시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보는 과정은 오히려 산뜻했다. 이력서에 현 직장을 기재하고 담당업무를 쓰면서 스스로를 돌아봤다. 이 것도 할 수 있고, 저 것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현 직장의 무 체계 덕분이었다. 단순 실무자가 아니라 프로젝트 매니저급의 업무와 능력치를 갖추게 되어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할 수 있었다. 약간의 급여 상승과 복지혜택이 주어지게 된 점은 퍽 만족스러웠다. 다만,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내 업무의 후임자는 또 계약직원으로 정해졌다. 정직원은 아무도 맡고 싶지 않음이 씁쓸하다. 정직원에게 업무를 분장하지 않고 책임 떠넘기기를 하는 관리자도 괘씸하다. 왜 힘든 일은 반복되는 것일까. 인수인계를 앞둔 마음만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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