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에는 회사일로 전화하지 말자. 회사에 화재가 나서 건물이 전소하거나, 홍수로 전층이 침수되고, 전쟁 나서 피난 가는 지경이 아니라면 전화하지 말자.
현 직장에서 내 포지션은 시스템 관리자이다. 전 직원의 권한을 지정하고 감독하며, 업무 서버 접근 승인을 한다. 이외에도 중요문서 승인 감독을 맡아 검토하고 마감 관리를 담당한다.
이번달에는 이직-이임 시즌과 동시에 중요문서 생성 마감이 있다. 왜 그리 마감은 안 지키는지 업무처리를 수월히 하기 위한 마감기한이 맞춰지는 것을 이 회사에서 본 적이 없다. 15일에 담당들이 본인 업무를 마감하면 16일에 관리자 작업을 마치고 17일에 업무 인수인계를 하려던 계획은 실현 불가능했다. 결국 업무수행을 위해 허락된 가장 마지막 날짜까지 일이 늦춰지게 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직원들은 마감이 미뤄져도 되는데 괜히 빨리 독촉한다고 불만을 가지며 차일피일 미루게 될 터이다. 마감 담당자는 최종 검토도 완벽히 거치지 못하고 마감만 급급하게 될 터이니, 작업의 결과물의 오류는 걸러낼 수 없다. 괴롭다. 결과물을 가지고 매년 업무점검, 3개년 정보감사를 받는다. 그해의 담당자만 독박을 쓰는 지긋지긋한 구조에서 나는 탈출해야겠다.
15일까지 공지했던 업무 마감이 이뤄지지 않았다. 개별적으로 모든 담당 직원들에게 업무 마감을 독촉했다. 3시간이 걸렸다. 오전 내내 독촉 전화와 메시지를 보냈다. 연장기간을 조율하는 것도 난관이었다. 정말 최대한으로 미루고 미뤄 마감일을 재설정했다. 이제 검토도 못하고 정말 딱 수합만 해서 결과보고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전화통에 불나게 내선전화를 돌려댔고, 개인전화까지 동원해서 연락했다. 그래도 연락이 닿지 않는 초특급 블랙은 딱 정해져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도 마감이 이뤄지지 않았다. 블랙은 여전히 연락되지 않았다. 회사 퇴근 후에는 집으로 출근하는 워킹맘이라 집에서 종종거리며 저녁식사를 준비해 남편을 먹이고, 아이를 돌봤다. 곧 돌이 되는 아기를 위해 유아식을 준비하고, 간식까지 정성껏 만들었다. 아이를 재우고 드디어 한숨을 돌리고 나니 밤 9시였다. 아이 옆에서 같이 잠들었다.
새벽에 아이가 벼락같이 울어서 깼다. 아이를 토닥여 겨우 재우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부재중 통화가 5건이 찍혀있었다. 오전 내내 연락되지 않던 블랙이었다. 밤 10시부터 전화를 해대는 그 사람의 정신상태가 두려워졌다. 부재중 전화에 카톡까지 보내 놓은 그 사람은 상식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근무시간에는 연락이 되지도 않다가 퇴근 이후에 이러는 행태가 2021년에 가능한 것일까. 아찔했다.
엄청난 고민 끝에 계약직 연장을 거절하고 이직을 결정했다. 나는 또 새 조직에서 업무를 할 것이다. 현 직장은 출퇴근도 가깝고 칼퇴근이 보장되는 곳이라 입사 때 대단히 만족했었다. 하지만 구성원이 최악이었다.
밤에는 연락하지 말자. 퇴근 후에는 연락하지 말자. 당장 연락 안 된다고 화내기 전에 시계를 쳐다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