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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Dec 15. 2023

양육은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이 아니다 (중)

“엔딩”이라는 정해진 목적


이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을 30년이나 지나 다시 생각해보면, 가장 의문이 드는건 왜 이 부양능력이 안되는 게임 속의 아버지가 딸을 키우고자 했는지다. 아버지인 게임플레이어는 쥐꼬리같은 연금을 받는데 (왜 나라를 구한 용사에게 아무리 쫄딱 망했다지만 겨우 둘의 식비도 안되는 만큼의 대우를 하는지 모르겠다.) 노동은 전혀 하지 않는다. 여러모로 엉성한 설정이 많지만 게임은 그저 게임이라고 애써 생각하는 수밖에 없겠다.  


아무튼 이 아버지의 목적은 이 소녀를 무엇인가로 만드는 것이다. 이 아버지가 하는 일은 딸에게 스케줄을 짜주는 것이다. 소녀에게 아르바이트를 시켜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교육을 시킨다. 그래서 엔딩 자체가 게임의 목적이 된, 이 게임의 제목은 바로 프린세스 메이커다.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의 무사수행의 한 장면


전편에서 언급한 그 기분 나쁜 관음증적 시선을 배제하고 보면, 프린세스 메이커에서 딸은 아버지의 화신, 아바타다. 딸을 통해 무사수행이라는 모험을 다시 떠나고, 딸의 어린 시절을 통해 환생하듯이 직업적 성취를 이루고 대리적인 자아실현을 한다.


내 또래 여자애들이 이 게임을 좋아했던 요인 역시 이 또래의 여자아이라는 아바타를 통한 대리만족이었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어, 게임 속의 아버지, 그리고 딸이라는 셋이나 함께 동일시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엔딩이라는 목표달성을 위해 스케줄을 따라가야 한다.    




현실에서의 육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때로는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아이의 학교 성적을 관리하고, 사교육 스케줄을 짜는 모습은 때로는 마치 현실 엄마인 나조차도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을 하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으니.


현실에서도 아이들의 엔딩을 부모가 정해놓고 달린다. 학원에서는 스카이반 같은 학교라는 엔딩을 정해놓고, 요즘 초등학교 수학학원 탑반 이름은 벌써부터 의대반이라고 정해놓는다. 과거 PC통신이나 인터넷에서 엔딩에 대한 공략집을 찾아보듯이 지금도 열심히 엄마들은 원하는 엔딩을 보기 위해 정보탐색을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의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특히 입시를 위해 일관성 있는 스토리텔링의 생활기록부를 요구하는 요즘 입시의 현실을 보면, 중간에 아이의 장래희망이 변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게임과 현실과 비교하여 가장 큰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고유의 영혼이 있는 주체성을 지닌 객체다. 미취학아동과 초등학생 아이도 당연히 열심히 자기주장을 한다. 내 경우 얼마 전 겨우 다섯 살 된 딸 아이의 유치원 옮기는 문제로도 딸 아이와 의견이 달라 무려 한달 가까이 함께 고민해야 했고, 결국 딸의 생각대로 정했다. 그리고 병원 가야하는 일정과 학원 스케줄이 맞물려 학원을 하루 빼려다가 초등학생 아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딛쳤다.


이 외에도 부모와 다른 의견을 표현하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 것인가? 게임대로 무작정 부모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나름대로의 주체성과 자아를 이미 내세우는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겨우 미취학 아동과 초등학생을 데리고도 이런데, 사춘기 애들을 데리고 이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프린세스 메이커 속 딸은 아빠말을 잘 듣는 순한 딸이었다. 소녀는 대부분 스케줄에 고분고분 따랐다. 때로 도덕성이나 감수성같은 수치로 가출을 감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것 조차 조작하는대로 따라준 딸이었다. 다시 말해 게임 속의 딸은 아빠 말에 자기의견 없이 따르는 아주 수동적인 존재였다.     


아버지보다 좋은 직업을 가지면 엔딩때 청출어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게임 속의 우리는 정해져 있는 엔딩을 위해 달린다. 이를테면 왕자에게 시집을 보내 왕세자비로 만드는 것이 곧 딸의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겨 왕자의 마음에 들게끔 딸의 능력치를 올린다. 아니면 그 나라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엔딩을 보려고 힘든 스케줄을 빡빡하게 돌리기도 한다. 딸은 부모의 의지대로 움직여야하는 말 잘듣는 인형같은 아이다.


그런데 아이를 아바타, 인형같이 보는 시선에 대해 그 부모의 욕심이라고 뭐라고 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이들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아이여야 한다는 시선은 꼭 부모들에게서 뿐만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아이들을 향한 전반적인 시선 역시 그러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이들은 밖에서 조금이라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것저것 만져보거나 시끄러우면 절대 안된다. 세상에는 어른들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커다란 룰이 있고, 아이들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자기조절력이 훨씬 좋고 더 완벽한 어른들을 미숙한 아이들이 먼저 배려하는걸 배운다.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태 속에서 오만가지의 차별과 갑질이 만연한 세상에서 아이들에게는 “ 그런데 너희들은 절대로 이기적으로 자라면 안 된다고 한다. ” 하고 강요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훨씬 많이 존재하는 세상이니까, 다수에 따라 흘러가는 세상에서는 그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을 하는 이유와 현실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이유는 결국 맥락은 똑같아 보인다. 양육자의 이상 혹은 어쩌면 욕망의 실현이라는, 육아의 대상자인 아이들의 고유성은 정작 배제되어버린 다소 황당한 이유로 말이다. 현실에서든 게임에서든 우리는 여전히 프린세스 메이커를 지향한다.


나는 이 게임의 최고의 백미는 수호신이 딸이라는 결과물에 대해 평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게임을 하는 과정보다 마지막 엔딩을 곱씹어보면 왜 요즘 우리는 아이를 낳고 키우려고 하지 않는지 좀 알 수 있을 것 같다. 길게 쓰고 싶지 않았지만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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