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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Dec 19. 2023

양육은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이 아니다 (하)

“좋은 부모”라는 타인의 기준


프린세스 메이커의 딸을 만 18살까지 다 키우고 엔딩을 보는 순간은 두근거린다. 그래서 스펙 쌓기를 위해 빡빡하게 스케줄을 돌린 결과가 내가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지 아주 궁금해진다.


게임 처음에 아이를 아버지에게 보내주었다는 천상계의 수호신들은 아이의 직업과 결혼 상대에 대해 평가한다. 스펙에 따라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를 귀천에 따라 평가하며, 여자아이를 키우는 게임이라고 어떤 남편을 만나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는지가 또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딸의 기품과 매력 수치라는 외모 요소로 달라진다. 도덕심이 낮으면 결혼을 아예 하지 못하여 엔딩에서 하자같이 취급하기도 한다. 이게 30년전 게임이라는걸 감안하자.




그렇게 수호신은 맨 마지막에 “그대는 좋은 아버지였다네”하고 판단해 준다. 이 게임에서 숨겨진 수치로 부모와 자식의 유대관계에 대한 수치가 계륵같이 존재하지만, 참고사항일 뿐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렇게 이 게임의 목적은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제목 그대로 딸이라는 결과로 좋은 아버지, 그저 그런 아버지, 혹은 나쁜 아버지로 평가받고 막을 내린다


이 게임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여전히 아이를 키우는 목적을 향해 달리기 때문이다. 아마 3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래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목적의 기준이 내적이지 않다. 아이를 낳고 키워서 외적인 가치와 세평에 기대어 아이를 잘 키웠는지 못 키웠는지를 따진다.


그런데 경제불황이 장기화되며 아이를 뭔가로 만들기에는 막대한 경제적 비용이 들며, 부모의 노력에 비해 아이의 미래는 상당히 불투명하다. 아이로 자아실현이 좌절되는 세상이라 우리는 이제 아이를 더 이상 낳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전에 나혜석을 주제로 쓴 글에서, 자녀에게 이해타산적인 개념이 존재한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당연히 자녀를 낳는 이유가 오로지 노후준비를 위한 경제적인 이유 때문 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자녀와 동일시가 지나쳐 자신의 욕망을 자녀의 욕망으로 투영하고, 또 자녀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려는 모습은 지금도 은연중에 많이 접할 수 있는 사례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자식과의 동일시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육아를 하는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나랑 똑같이 생긴 자식의 어린 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다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 같은 이상한 착각이 들 때가 있음을. 자식과 동일시하는 행태는 생물적인 본능 같은 느낌이다. 그렇기에 육아라는 그 환희와 좌절 사이에서의 경험은 부모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도 성장하게끔 한다.


서구권에서 동아시아 문화의 양육태도를 tiger mom이라고 비유한다


일본에서 만든 게임이지만 이런 양육에 관한 행태는 우리나라,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비슷하게 드러난다. 이런 동아시아 국가들이 세계적으로 저출산의 선두를 달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녀의 입신양명과 출세같은 외적가치 달성을 자녀의 행복이라고 가르치고 부모의 행복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저성장 경제로 접어들며 가족이라는 소집단의 외적 목표 달성이 어려워지니 저출산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왜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난히 부모와 자식 간의 동일의식이 강할까? 개인보다 집단을 강조해 온 문화와 내세보다 현세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 온 문화가 떠오른다. 그나마 가족중심적인 기독교 사상이 사람들의 사상의 바탕이 되는 서구권과 가족에 대한 관점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내 경험적인 이야기라 다소 단편적일 수 있지만, 서구권에 사는 이들도 부모자식 간의 동일시하는 의식이 존재한다. 그들도 자식들에게 I‘m so proud of you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그 자랑의 결이 조금 다르다.


이들의 칭찬은 목적보다 태도와 과정에 조금 더 집중되어 있다. 가령 자녀가 상을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꼭 서술한다. 반면 우리는 자식이 어떤 결과에 달성했는지에 치중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우리 아이가 어느 학교에 들어가고, 어떤 상을 받았고, 어느 시험에 합격했다는, 그런 결과들 말이다.


문제는 ‘과도한’ 욕망이다. 부모의 만족을 아이의 행복과 동일시하며, 아이의 행복을 왜곡시키는 우리 사회의 행태로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은 OECD 국가 어린이 중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답하고 있는 것은 통계로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꼭 타자의 시선에서, 사회적으로 번듯한 자식이어야 자식도 부모도 행복한 걸까? 그 타자의 시선에 묶여 우리는 세상과 부딪힐 용기마저 꺾인 것은 아닐까? 그렇게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그 치열한 목표 달성 과정에서 우리 가족이라는 집단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양육은 인간, 생명체로 누리는 행복인데, 왜 부담 내지는 여자의 삶을 속박하는 굴레쯤으로 여겨지고 있는지 말이다.


  


결국 저출산 문제는 여타 사회적인 이슈보다 우리 사회 가족의 과도한 욕망을 최우선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아무리 자녀를 낳는다고 목돈을 주더라도, 또는 아무리 성평등을 말하더라도, 자녀로 인한 실현 가능성이 단절된 사회에서는 결코 아이를 낳고 키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녀와 동일시는 본능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도, 타자의 시선에 의한 행복이 아닌 자기 내면의 행복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중요한건 이를 꼭 부모들만의 이기적인 욕망이라고만 선 긋지 말아주셨으면 한다. 그걸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과정보다 퍼포먼스 (결과가 아니다. 외화내빈이더라도 외형적인 퍼포먼스) 중심이지 않은가? 이런 부모들의 이런 모습은 그저 우리 사회의 단면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딸이며 아들이고,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존재한다. 결국 천륜은 실존한다. 우리 사회의 가족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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