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어린 딸아이가 유난히 좋아하는 책이 있다. 바로 피터팬이다. 이 아이의 엄마인 나는 조금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책이 피터팬이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다양한 기호 중 하나이고 어쩌다 하나가 맞아 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가끔 이런 취향이 똑같은 것을 발견할 때면 이런 사소한 것조차 유전이 되는가 싶어 경이롭다.
나는 어릴 적 공주 이야기, 소위 소녀 취향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고난사를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다. 내가 겪은 양 이입해서 보며 그녀들의 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 탓에 나는 지금까지도 영화나 시트콤은 잘 보지만, 갈등으로 스토리를 질질 끌고 결말을 기다려야 하는 드라마를 잘 안 보는 것 같다.
어릴 적 집에는 공주님 이야기 책이 참 많았다. 백설공주, 엄지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인어공주 등등. 그 수많은 공주 이야기들은 전개와 결말이 다 비슷했다. 예쁘고 착한 공주가 우여곡절을 겪고 왕자님을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더라. 왕자님이 왜 멋있는 사람인지, 사랑에 빠져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아이를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그 하나같이 똑같은 엔딩도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피터팬 책을 보니 얼마나 재미있던지. 그냥 단순히 피터팬을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평면적인 캐릭터에서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났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거기다가 피터팬은 하늘을 날게 해 주고 환상의 섬 네버랜드에 데려가주지 않는가? 왕자님과의 엔딩에는 설렘이 없지만 피터팬 이야기는 설렘이 가득했으니. 피터팬에 빠져들 수밖에.
피터팬을 좋아하는 딸을 보고 남편에게 내 첫사랑은 어쩌면 피터팬이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첫사랑이 그런 불한당이었냐고 나를 놀렸다. 그런데 내 이상형이 백마를 탄 왕자님이었으면 결코 그이를 만나서 결혼했었을 리가 없었을 거다.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소년과 어른의 중간이던 스물한 살이었다. 지금은 영락없는 40대 아저씨지만 나는 남편의 소년의 흔적을 기억한다. 남편은 그 시절에도 누군가를 잘 놀리는 꾸러기 같은 성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광범위한 놀림의 대상에서 나는 빠져있었다. 그게 날 좋아해서 그랬다는 걸 전혀 모를 정도로 나는 둔감한 여자아이였으니.
어쩌면 내 딸도 언젠가 피터팬 같은 남자친구를 데려올 것이다. 엄마 눈에는 순간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어서 걱정이 될지 모르지만 재미없는 백마 탄 왕자님보다 재미있는 피터팬과 행복하게 살라고 딸을 응원하지 않을까?
피터팬과 사랑에 빠진 딸을 보니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원작 소설에는 웬디의 엄마인 달링 부인도 어릴 적에 피터팬을 따라갔었고, 웬디의 딸 제인도, 제인의 딸 마거릿도 피터팬을 만난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이렇게 내 딸도 피터팬을 따라가게 되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단순한 이야기의 결말을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경험하게 만들었다는 게 작가의 의도라면 천재적이다.
그러고 보니 피터팬 원작 이야기를 구전으로만 듣고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 최근에 읽었다. 동화인 줄 알았던 피터팬은 어른을 위한 소설이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그것도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피터팬 이야기를 다시 읽으니 더욱 많이 와닿는 이야기였다. 어른이 되는 건 무엇인지. 엄마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인지. 다음 이 시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