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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Jan 02. 2024

안녕, 내 첫사랑 피터팬 (하)

우리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 걸까?


피터팬 이야기의 메인은 피터팬과 웬디라는, 12살 동갑내기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웬디는 피터팬에게 매료되어 키스를 해주겠다고 하지만, 피터팬은 키스가 뭔지 조차 모르는 아이다. 엄마 아빠의 사랑과 키스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버랜드로 간 웬디는 피터팬을 비롯한 네버랜드 꾸러기들의 엄마가 된다. 피터팬이 웬디에게 기대했던 사랑은 모성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것에 머물러 있었고, 웬디는 네버랜드 꾸러기들에게 그 역할을 수행한다.


네버랜드 꾸러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소녀 취향의 동화인 신데렐라였는데, 신데렐라 같은 엄마를 만나기를 꿈꾼다. 그리고 웬디는 이 아이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며 한 발자국 더 어른이 된다. 마침내 현실로 돌아가서 오지 않는 피터팬을 기다리다가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어 어른이 된다.



어째서 웬디만 어른이 된 것일까? 단순히 엄마가 되는 선택을 해서? 그렇다기 보다 웬디는 피터팬을 포함하여 네버랜드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을 베풀 수 있었기에 어른이 된 것이고, 여전히 엄마로부터 받는 사랑만 갈구하는 피터팬은 아이로 남은 것일테다.






아이에게 디즈니 플러스로 피터팬 만화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옛날에 나온 오리지널 피터팬 만화는 키즈 계정에는 나오지 않고 성인 계정으로 로그인해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경고문이 떴다.


이 만화는 사람이나 문화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학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이런 편견은 당시도 지금도 잘못되었다. 콘텐츠를 제거하는 대신 유해한 영향을 인식하고 과거로부터 배우며 포용적인 미래를 만들고 싶다. 이런 내용이다.


어릴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해적은 담배를 뽀끔뽀끔 피고, 백인에 대한 우월의식,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적 표현이 적나라하다. 꼭 피터팬뿐만이 아니다. 피노키오도, 아리스토캣도,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즈니 만화인 덤보도 그러하다. 귀뚜라미가 그렇게 골초였다니. 어른이 된 나는 헛웃음이 나온다.



이렇게나 의식하고 조심하는 디즈니는 역설적으로 대중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디즈니의 과거작의 리메이크들도 모두 보았다. 논란은 둘째치고 흥행에서 좋은 반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그 기준이 원인이라기 보다도, 원작의 본질을 더욱 심층적이고 입체적으로 해석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피터팬이 하늘을 나는 의미와 웬디가 어른이 되는 의미를 어떻게 찾는지. 모성을 대체해야 했다면 그만큼 감동적이고 밀도 있는 서사가 필요했다. 그것에 실패했기에, 이야기에서 제일 중요한 재미는 다 놓쳐버린 것 같다.


요즘은 부모마다 전래동화와 명작동화물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그래도 나는 고전은 최대한 원전에 가깝게 접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린이용 각색판도 결국 원작 작가의 메시지를 살리지 못한다. 우리가 어릴 적에 <개구리 왕눈이> 같은 만화를 봤지만 만화의 묘사가 여러 가지로 옳지 않다는 걸 알듯이. 이 정도 묘사는 아이들이 사리판단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피터팬 원작 소설은 모험 소설이라기 보다도 어른을 위한, 가슴 한켠에 각자의 피터팬과 웬디를 간직한 이들에게 어린 날의 성장통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라고 느꼈다. 어느 구절이 먹먹했는지 인용하고 싶어도 스포일러가 될까 적지 못하겠지만.


누군가를 위해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이제 부정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어른이라고 느낀다. 그게 불행이 아니고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그때야 비로소 ‘진짜 어른’이 아닐까.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되었다면, 피터팬을 꼭 다시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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