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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Jan 16. 2024

다섯 살 딸아이가 엄마가 되고 싶은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이유

작년에 한창 원고작업을 할 때였다. 나 혼자 내 책 주제인 ‘엄마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끙끙거리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옆에서 다섯 살 딸내미는 엄마놀이에 한창이었다. 인형을 티셔츠에 넣고 볼록한 배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 배 속에 아기가 있어요!!”라는 말과 함께.


이게 가짜 놀이라는걸 알지만, 내 딸이 출산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니. 게다가 오빠라는 내 아들 녀석은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를 읊으며 익살스럽게 인형들을 줄줄이 꺼냈다. 다산의 여왕 앞에서 그저 나의 서늘한 간담을 부여잡고 웃을 수 밖에. 그러고 보니 내가 임신했다고 했을 때 우리 엄마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이고 인형들을 토닥거리며 엄마 역할에 푹 빠져있는 딸아이한테 물어보았다. 00이는 엄마가 왜 되고 싶으니? 그러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간단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좋아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기도 하지만 딸은 이렇게 그날도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거기다가 아직 엄마를 무조건 사랑해 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고맙다고 말하며 울먹일 뻔한 내 개인적인 감상은 뒤로 해야겠다.


이 명제를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엄마가 좋으니까, 엄마가 될 거야”를 바꿔보면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엄마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싫어했으니까. ”가 된다.






우리는 초저출산의 현실이 달라질 기미가 없는 이제 와서 비로소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하는 여러가지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경제적 이유, 이념의 이유 등등 여러 이야기가 각자의 관점에서 지저분한 평행선을 그리고만 있으니 사회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최소 몇년 이상 걸릴것 처럼 요원해보인다.


나는 그와 관련된 좀 다른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다. 이 역시 또 다른 선을 그어 지저분하게 만들지 모르겠지만 과연 무의미할까 싶다. 내 책에서 말한 ‘엄마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인 혐오’와는 더 다른 이야기다.


그동안 어머니는 자녀에게 절대적인 자애로움을 주는 존재로 여겨져 왔으며, 그런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을 효도라는 이름으로 당연시했다. 엄마를 싫어하는 건 감히 어디 말도 꺼내지 못할 것이요, 천하의 불효자식, 더 심한 말로 후레자식 쯤이었다. 엄마뿐만이 아니다. 아빠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터넷의 익명 게시판에서 우리는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부모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부터 시작해서 “부끄럽다”부터 ‘애비충’, ‘맘충’ 등등 혐오단어까지 등장한다. 부모로부터 받은 곪은 상처의 향연이다.






요즘 쏙 들어간 옛날 말이 떠오른다. “꼭 너 같은 것 낳아서 키워봐라”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의 본질은 너도 죽도록 고생해 보라는 일종의 저주라기보다, 그 입장이 되어봐야 나를 이해하지라는 말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기회조차 상실되어 가는 시대에서는 그저 무의미한 메아리로만 들릴 뿐이다.


하나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리는 자신의 미성숙함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관대하지만, 타인의 미숙함에 대해서는 굉장히 가혹한 잣대를 적용한다. 꼭 공인,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 남에게만 그렇지 않다. 가족, 부모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미숙함에 대해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의 가족은 이런 모습을 하게 된 걸까? 그것은 우리 부모들의 탓이었을까? 그들은 그저 미숙했다는 이유로 용서받지 못하고 업보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 전체가 소멸되지 않으려면 부모와 가족에게서 받은 우리 사회를 관통한 거대한 상처를 성찰하고 치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요즘 하는 생각에 대해 적어보았다. 내가 아이를 한창 키우고 있으니 나도 한없이 미숙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육아라는건 아이한테 미안하면서도 부모님에게도 미안한, 그런 감정의 연속인 것 같다.


그래서 육아는 나를 혹독하게 성장하게끔 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나도 아직 내 머릿속의 이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 무엇이 정답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도 우리 사회의 초저출산의 문제가 단지 경제적이나 특정 이념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일 뿐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에 대한 원망에 매몰되어 있는 삶은 결국 영원한 불행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네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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