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생이 오면 선생님께서 칠판에 이름을 적어주신다. 나는 교탁 옆에 표정 없는 송아지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있었다. 8살부터 그 후로도 학교를 계속 옮긴 내가 마지막 고 2 때 전학까지 익숙해져야 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참으로 아이들은 나를 신기하게 보았다. 교실에 아이들이 바글바글해 보였다. 서울에서는 학생이 38명이었는데 이곳은 50명이 조금 안 되었다. 한 학년에 반이 4개밖에 없는 작은 학교였다. 그나마 여기는 읍내에 있는 학교라 제일 크다고 했다. 면에 있는 학교는 한 학년에 반이 보통 2개고 분교라는 것도 있다고 했다.
운이 좋게도 선생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었다.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는 히메나 선생님 같았다. 내가 전학 오고 금방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은 잘 기억할 수 없는 선생님의 배려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 이후의 전학 후 적응이 녹록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건 큰 행운이었다.
2학년으로 올라갈 때 아이들을 반배정을 다시 하지 않고 그대로 올라갔다. 그 점도 내가 첫 전학에 잘 적응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서울에서는 4교시밖에 없었지만 이곳은 수업이 6교시까지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요즘의 맞벌이 가정을 위한 돌봄 개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갑자기 학교에 오래 있어야 했던 게 너무 힘들었던 기억니다.
많은 책이 들은 책가방은 무거웠고 도시락까지 들고 가야 했다. 도시락을 싸 오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고 학교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던 친구도 있었다. 그만큼 생업이 너무 바빠 챙기지 못했던 것일 거다.
학교에 끝나면 나는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하며 친구 엄마가 일하는 식당이나 가게에 간 기억이 있다. 그때 추어탕이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봤는데 나중에 추어의 정체가 미꾸라지라는 걸 알고 기함했다. 서울에 이런 것 없다며 튀겨주신 메뚜기튀김도 생각보다 고소하고 맛있었다.
엄마는 나중에 그 친구들을 우리 집에 다 데려오라고 했다. 우리는 아직 어른들의 세계에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그냥 친구들과 다 같이 노는 게 재미있던 아이들일 뿐이었다.
2학년 때 가정환경조사를 하는 날이 기억난다. 선생님은 설문지를 집에서 부모님이 작성해오게 하고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손을 들게 하고 취합했다. 화이트컬러 직종은 단 두 명뿐이었다. 대부분 장사를 했고, 몇몇은 공장에 다닌다고 했고, 또 농사일을 한다고 했다. 그곳에서 우리 부모님만 유일한 대졸자였다.
대학원졸, 대졸, 고졸은 무슨 뜻인지. 회사원과 공무원의 차이가 뭔지. 집에 온 내가 이런 걸 물어봐서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물어봤던 엄마는 다 듣고 비교육적이라며 질색하셨던 기억이 난다.
2학년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 같은 선생님이셨다.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열심히 말하셨던 옛날 사람이었다.
나는 그 선생님을 좋아했지만 엄마는 여러 가지로 그 선생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도 전직이 선생님이었는지라 학교 다니는 12년 내내 선생님에 대한 호불호를 나에게 대놓고 표시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엄마가 또 싫어했던 건 장터에서 나오는 가사가 통적인 노래를 틀고 쉬는 시간마다 율동을 배운 것이었다. 노래제목이 아리랑 처녀와 개구리 노총각이었던 노래를 집에서 열심히 불렀다.
손목이 아플 정도로 숙제가 아주 많았다. 주로 글씨 쓰기와 교과서에 있는 그림을 그대로 서너 번 따라 그려오라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매일 숙제를 도와주던 엄마가 차라리 잠을 자라며 숙제를 대신해줬다. 그게 엄마가 내 숙제를 대신해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엄마는 싫어했던 그 선생님을 나는 좋아했던 이유는, 그래도 선생님의 방식이 좀 아니었을지 몰라도 가르치는 열정과 아이들에 대해서는 진심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언젠가 산수시험을 봤는데 60점이었다. 십의 자리 수에서 받아 내림하면서 빼는 단원이었다. 나는 그때 딱 처음으로 나머지 공부라는 것을 했다. 굉장히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며칠 내로 개념을 정확히 터득하고 바로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보습학원이라는 사교육이 대체했었던 이 나머지 공부는 지방에 있던 학교에서는 모두 했었다.
이곳은 사교육 불모지였다. 피아노 학원이 딱 하나 다소 먼 곳에 있어서 꽤 걸어 다녔다. 방문수업은 알아볼 수도 없었다. 내 심심함을 달래주는 건 비디오와 책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제대로 된 서점도 없었던 지라 책을 사러 도시에 나가는 게 일이었다. 그래서 읽던 책을 또 읽고 나중에는 너무 심심해서 엄마 아빠가 보는 어렵고 글자가 빼곡한 책까지 모두 읽었다.
방학 때 선생님들은 나와 윗학년 언니 오빠들과 글짓기 공부를 하러 오라고 하셨다. 선생님들이 이렇게 방학 때까지 출근해서 공부를 시켰던 이유는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백일장 대회에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사실 원고지 쓰는 방법이나 맞춤법 외에 대단한 요령을 알려주시지는 않았다. 방학 때도 학교에 가야 한다는 건 별로 좋지 않았고 내가 뭘 잘하는 지도 몰랐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니 그런가 보다 했다.
내 기억에 서울 선생님들은 밋밋하게 남아있지만, 지방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독특하고 개성 있고 열정이 있었고 겹치는 캐릭터가 없었다. 내 단편적인 경험이라 다 그렇다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대체로 그런 성향들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 그때만 하더라도 지방은 서울보다 사교육 분위기가 강하지 않고 교실 안에서 선생님의 재량이 더 실려있어서 그랬을까? 그만큼 어떤 선생님을 만나는지는 서울보다 지방에서 훨씬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초등학교 생활은 1년 반 만에 끝났다. 2학년 겨울방학을 마치고 나는 또 다른 소도시인 B 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별이라는 순간이 와닿았다. 내가 전학 가는 날은 교실이 눈물바다였다. 나는 한동안 친구들과 편지를 열심히 주고받았지만 내가 워낙에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끝까지 주고받을 수 없었다. 그 친구들을 두 번 다시 만난 적도 없다.
친구들도 선생님들에게도 대체로 예쁨 받으면서 자라온 기억이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지독한 텃세와 따돌림까지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달라지지 않는데 환경과 주변 사람들은 예고 없이 무작위로 달라지는 것이었으니.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만 존재하지 않았다. 때로는 이상한 환경과 못된 사람들까지도 만날 수밖에.
세상은 낭만적이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 나에게 그렇게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