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서울 사람들은 지방을 뭉뚱그려 시골이라고 말한다. 어릴 때 여러 지역에서 살아본 나는 당연히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서울도 모두 같은 서울이 아니다. 구마다 동마다 동네 분위기가 굉장히 다르다. 지방일수록 발전도는 판이하다. 일부 광역시, 지방의 일부 지역은 서울의 낙후된 지역보다 더 발전해 있다.
인구 5만 미만인 같은 군 단위라도 발전한 정도도 천지차이로 다르다. 그러니까 시골도 다 같은 시골이 절대 아니다. 같은 우리나라라도 사람 사는 모습과 동네를 지나치지 말고 들여다보면 정말로 각양각색이다. 서울과 지방의 발전도가 기형적일 정도로 균형을 잃어 지방의 개성과 특색이 주목받지 못할 뿐이다.
1992년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처음 이사를 간 A라는 지역은 시골이었다. 내가 살았던 곳 중 서울에서 가장 멀고 인구수도 가장 적었다. 아주 작은 읍내 외에는 모두 농촌이었고, 공장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농업과 상업에 경제활동을 의존했다. 농업 중심이어도 지역 사람들 대부분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특산품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읍내에 가장 큰 건물은 관공서 건물이었다. 작은 읍내에 아파트는 3층짜리로 딱 두 개의 동이 있었다. 그것도 군인 관사용 아파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읍내 한복판에 위치한 단독 주택에 살았다. 그나마 읍내에는 건물이 있었지만, 그 작은 읍내를 벗어나면 모두 초록색의 논밭이었다.
서울과 모든 것이 달랐다.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백화점과 슈퍼마켓 대신의 5일장에 가야 하는 것도. 2차선 도로는 한적했고 버스와 자동차도 많지 않았다. 사람 구경하기, 특히 내 또래를 찾기가 힘들었다. 달라진 환경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5살짜리 내 동생은 더 어리둥절해 보였다.
내 동생은 매일같이 버거킹과 SBS 채널을 찾았다. 1992년에 서울에는 서울방송 채널이 처음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울에서 단 몇 달 동안 개국기념으로 틀어주던 재미있는 만화와 어린이 프로그램에 정신이 쏙 빠져 있었다. KBS는 미국이나 일본의 70-80년대 옛날 만화를 수입해서 보여줬는데 SBS는 비싸게 주고 수입한 최신 90년대 만화를 보여주니 당연히 재미가 비교가 되었을까? 나중에 경기도에 사는 친척들 집에 방학 때 놀러 가서 달려라 코바와 피구왕 통키를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지방의 문화생활의 접근성은 개선해야 하는 과제다. 그나마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의 발달로 문화 콘텐츠 접근에 대한 장벽이 낮아진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서울과 지방의 생활의 모습을 극명하게 차이 나게 했던 것은 유통망이었다. 지금은 온라인 쇼핑으로 웬만한 지역에서 원하는 물건을 하루 이틀 안으로 받을 수 있다. 일부 오픈런을 마케팅으로 내세우지 않는 사치성 브랜드가 아니면, 백화점에서만 파는 물건도 다 구할 수 있다.
그 시절 지방에서는 의식주 자체가 서울과 너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는 백화점도 거의 없고 파는 상품군 자체도 서울과 너무 달랐다. 가끔씩 직할시나 큰 도시에 가서 백화점에 가도 서울 상가에서 쉽게 구할 물건도 없었다.
진짜 답답했던 사람은 우리 엄마였을 것이다. 이 답답함이 지금에서야 새삼 느껴지는 것은 내 어린 두 아이의 나이가 나와 내 동생 나이 언저리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을 거고 일이 늘 바빴던 아빠는 집에 별로 없었다. 엄마도 도시 한복판 태생이었다. 그런 손바닥만 한 곳은 난생처음이었다.
우리 엄마의 유일한 즐거움은 이모들, 친구들과의 전화 통화였다. 우리는 지역번호 DDD가 4자리인 곳에서 살았고 시외전화 요금 할증요금은 무시무시했다. 어느 날 엄마는 전화요금이 무려 2만 원이 넘게 나왔다며 이제 전화를 그만해야겠다며 손을 덜덜 떨었다.
우리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처음 살았다. 엄마는 마당에 여러 가지 꽃과 작물을 키워 보여주셨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이라고 동네에서는 키워보라며 토끼와 진돗개를 주셨다. 어느 날은 동네 사람들이 살아있는 토종닭을 주기도 하셨다. 사실 그건 키우라고 주신 게 아니라 싱싱하게 잡아먹으라고 주신 것이었다. 닭을 처치할 수 없어 우리는 마당에 풀어놓고 키우며 매일 알을 낳는 것을 보았다.
소동물들과 생활은 한가롭고 낭만적이지 않았다. 진돗개 진숙이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쇠사슬을 끊은 어느 날, 우리 안까지 들어가 닭과 토끼를 무참히 물어뜯어 잡아먹고 말았다. 어린 나는 충격이 컸고 많이 울었지만 어떻게 학교를 다녀오면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를 미워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이후 수 십 년간 나는 개를 많이 무서워했다.
텔레비전조차 별로 재미없고 하루하루 따분했다. 나는 재미를 직접 찾아야 했다. 나는 김영사에서 출판된 <재미있는 별자리여행>을 좋아했다. 그 책을 페이지가 닳도록 보며 별이 영롱한 밤하늘 속에서 쓰르라기 소리를 들으며 별자리를 찾아 헤맸다. 지금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북두칠성 카시오페아자리 오리온자리 같은 잘 보이는 별자리는 바로 찾을 수 있다.
우리 집에는 아주 커다란 모과나무 감나무와 은행나무, 무궁화,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아마 내가 기억 못 하는 꽃과 나무가 더 있었을 거다. 감나무는 홍시가 되면 담 너머 골목까지 질척거리며 떨어져 이웃들이 불편을 호소했다. 이듬해에 엄마는 땡감을 전부 따서 그 많은 열매껍질을 깎고 하나씩 실에 꿰어 말려 곶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는 길 바로 건너편에 있는 학교를 담너머로 바라보며 개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서울의 학교와는 달리 아담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작은 건물과 대비되는 아주 큰 운동장이 있었다. 이 운동장은 학교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었다. 공연이나 선거유세 등 온갖 동네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 우리 집까지 주말에도 시끄러웠다.
학교는 아이들에게는 거의 전부와 다름없는 세상이다. 나에게 어떤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설레는 마음만 가지고 전학 수속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