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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Aug 13. 2024

1994 : 흐린 기억의 세 번째 학교

누구나 날 언제나 좋아해주는건 아니라

소도시 B 군으로 이사를 간 시기는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을 거의 마쳐가던 1994년의 2월이었다.


B 군에서 살게 된 집은 그 당시 50년이 훨씬 넘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집이었다.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집과 아주 비슷했다. 나는 <이웃집 토토로>와 같이 이 집을 낭만적인 장소로 생각하지 않는다.


낡아서 삐걱거리는 다다미 마루, 유난히 좁았던 일본식 화장실,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서재, 그리고 전 주인이 두고 간 꼬질꼬질하고 불쌍한 늙은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집은 다른 건물들 사이에 켜켜이 둘러싸인 요새 같았다. 그 더웠다던 1994년 여름이 별로 덥지 않았을 정도였지만 겨울은 외풍이 심해 혹독하게 추웠다.



음습한 집이었다. 토토로보다 일본 추리소설에 나올  법했다. 그나마 일본식 정원은 운치가 있어 나는 자주 바깥에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이번에도 정원에 해바라기, 토란 같은 여러 꽃과 작물을 심어서 집에 생기가 돌게 했다.


집이 워낙 독특해서 이 집을 떠난 오랜 세월 동안에도 가끔씩 궁금했었다. 나중에 이 집을 2000년대 넘어가 철거했다고 들었다. 몇 년 전에는 내 아이들과 휴가길에 잠깐 집터에 들른 적도 있었다.




나의 세 번째 학교는 직전의 두 번째 학교와 많이 비슷했다. 읍내에 위치한 학교였고 한 학년에 4개 학급인 것도 똑같았으며 석유난로에 도시락을 올려놓던 것도 비슷했다.


그런데 이 동네는 전에 살던 곳과 비슷했지만 뭔가 달랐다. 그 이유는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니 알 것 같다.


언뜻 B 군은 A 군보다 더 발전한 곳처럼 보였다. 고층 아파트 단지도 있었고, 기차역도 있어서 서울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관공서 건물들은 훨씬 컸고 큰 문구점과 서점 같은 A 군에 없던 가게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10살이던 내 눈에도 분위기가 침체되어 보였다. 시장에 가보면 A 군은 상인들이 금으로 된 장신구를 걸고 있을 만큼 사람들이 여유가 있었다. 규모가 큰 5일장은 늘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B 군은 그렇지 않았다. B 군은 동서남북이 시 단위의 큰 도시들로 둘러 싸여있었다. 양질의 일자리는 큰 도시에만 있었을 것이고, 지역경제 만으로 온전히 동네가 돌아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어른이 된 나의 추측이다. 실제로 우리 가족들도 아프거나 뭘 사야 하는 일이 있으면 인근의 큰 도시들에서 해결했다.




그런 분위기가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투영되지 않았나 싶다. 2000년쯤 내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다모임이나 아이러브스쿨 같은 동창 찾는 사이트가 유행했었다. 나도 반가운 마음에 내가 전에 다녔던 학교 친구들을 찾고 싶었으니.


그래서 이 학교 게시판에도 글을 남겼는데 돌아온 싸늘한 반응은 잊었던 햄버거 사건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끔 했다. 기억하지 않는 어떤 아이가 “너는 좋은 부모님 만나서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는구나?”라는 내용으로 부러움과 조롱 중간쯤으로 내 글에 댓글을 달았기 때문이다.



햄버거 사건은 내가 처음으로 따돌림을 겪어본 일이었다. 전학 온 첫날 도시락을 싸가야 하는지 몰랐다. 어린 동생을 보며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바빴던 엄마 대신 아빠가 읍내의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세트를 직원을 통해 사서 보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아이들의 눈이 뭔가 고깝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당시 수입 농산물이 이슈여서 신토불이 기조가 유행했는데, 농업에 의존하는 지방에서는 이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햄버거를 먹으면 우리 먹거리 전통을 지키지 않는 나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런 걸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집이 여유가 있던 아이들이 별로 없었던 거다.


감자튀김을 먹던 나를 반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지렁이를 먹는다고 놀렸다. 어린 마음에 나는 전학 온 첫날부터 눈물 콧물을 찔찔 짰다. 나에게 서러움의 상징은 눈물 젖은 빵이 아닌 눈물 젖은 식은 감자튀김이다.




햄버거 사건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뒤 어떤 남자아이가 멜로디언을 제법 잘 다루던 내게 오더니 우리 집에 피아노가 있는지 물어봤다. 있다고 대답하니 그 아이는 내 앞에서 멜로디언으로 당시 방영 중인 드라마 파일럿의 주제가를 떠듬떠듬 연주했다. 자기는 집에 피아노가 없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 않지만 잘 친다며. 그 아이는 나름 음감을 타고 난 걸 자랑하고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드라마를 잘 안 보는 나는 그 노래를 몰라 못 친다고 하니 바보라고 했다. 하나가 놀리니 주변의 여럿이 같이 또 그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다녔었던, 학교 앞 피아노 학원은 이상하게도 늘 썰렁했다.



동네가 바뀌면 놀이규칙이 전부 달라진다. 아이들이 처음에 편을 가를 때 하는 데덴찌, 우에시다리 등등도 말이 다르다. 공기놀이, 쎄쎄쎄 같은 놀이 규칙도 모두 달라졌다. 그런 걸 텃세 부리는데 이용하는 거다. 너 이거 할 줄 아냐. 왜 못하냐. 놀 줄 아는 게 없다. 얘는 어떤 아이들은 대놓고 쟤랑은 같이 놀지 말라고 했다.


몇 주 남짓의 괴롭힘과 따돌림이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린 나이에는 충격이었다. 게다가 나는 학년 말에 전학을 왔고 타지로 전근 예정이던 담임선생님은 나를 신경 써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3학년이 되어 반배정이 새로 받으며 이상한 아이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학교 생활은 담임 선생님도, 아이들도 무난했던 기억이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아버린 나는 확실히 위축되었다. 나를 드러내는 것 조차 잘난 척으로 볼 수 있는 걸 알았다.


하루는 참관수업에 온 엄마가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앞장서서 떠들고 발표하는 걸 좋아하던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나도 친구들에게 무작정 다가가지 않았다. 그냥 하나 둘 정도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아 어울리면 되는 것이었다. 나를 싫어하는 친구도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걸, 누구에게나 예쁨 받으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또래보다 조금 빠르게 알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 해에 나는 참 많이도 아팠다. 홍역도 걸리고 감기와 폐렴, 중이염을 달고 살아서 학교에 빠진 날이 거의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우리 엄마는 그 옛날에도 개근에 전혀 집착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프면 당연히 쉬어야지.


다만 병원에 다니는 게 고되었다. 2주 내내 고열을 치른 홍역이 다 낫고 나서야 “홍역이었네요”라고 진단한 그 동네 병원에 엄마는 화가 많이 났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차로 한 시간 넘는 거리의 큰 시내의 이비인후과를 어설픈 초보운전으로 우리 남매를 데리고 다녔다.



나는 학교를 많이 나가지 않는 빼빼 마른 소녀였다. 집에서 책만 많이 읽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책을 가장 많이 본 시기는 그 시기였다. 병약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와 <해저 2만리>같은 모험 소설들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책만큼은 아낌없이 사주셨다.


오랜만에 학교를 가면 살짝 어색했다. 내 짝꿍이자 반장이었던 남자아이가 학교도 많이 빠졌으면서 시험은 잘 본다며 볼맨 소리를 했었던 기억도 난다. 이 학교에서도 백일장 대회에 내보내졌고 상을 받아왔다. 조회시간에 운동장에서 전교생 앞에서 박수를 받아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점점 아끼는 아이가 되었을 뿐이다.




B 군에서 1년을 채웠다.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도 마음에 맞는 친구는 존재했다. 그들과 영원히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또 울었고 엄마는 그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또 다른 소도시 C 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과연 나는 이번에는 그곳에서 어떻게 지낼까? 내가 이사를 가게 된 곳은 경기도였다. 나는 드디어 SBS 채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절찬리에 방영된 피구왕 통키는 진작에 종영한 걸 알았지만 그래도 신났다. 어떤 학교일지, 어떤 친구들을 만날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새로 이사 가는 곳은 이 곳보다 나을 것이라는 직감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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