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아옹 Aug 20. 2024

1995 : 열린교육에 대한 추억

우리 가족은 3년 만에 먼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이사 간 곳은 경기도 북부의 한 소도시였다. 이삿짐 정리가 끝나자마자 텔레비전부터 틀고 6번 채널을 찾았다. SBS 만화는 여전히 재미있었고 대단히 문명에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의 규모도 상당히 컸다. 그전까지 한 학년에 4반까지 밖에 없는 학교를 다녔는데, 이곳은 8반까지 있었다.


1995년부터 6차 교육과정이 적용되었다. 이때 강조하던 교육기조는 “열린교육”이었다.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인 학습자로 보고 창의적인 인재상으로 키우자는 교육방침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학력 저하를 우려하여 열린교육에 대한 우려와 호불호가 심했다.




내가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담임선생님은 젊은 남자선생님이었다. 머리숱이 약간 적으셔서 나는 선생님의 나이를 40대라고 기억했는데, 언젠가 엄마는 그 정도 나이는 절대 아니었다고 내 기억을 정정해 주셔서 죄송한 마음이다.


선생님은 개량한복을 자주 입고 다니셨고 풍물놀이 부를 담당하셨다. 농악이 아니라 우리 전통의 풍물놀이라고 알려주셨다. 성격이 내성적인 나에게도 정적인 악기연주보다 풍물놀이부에 들어올 것을 권유해 주셨지만 내가 별로 흥미가 없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종종 학교 뒷산에 가서 개구리알을 하루종일 채집해 왔다. 그 외에도 교실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체험활동을 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노래 공책이 따로 있고 가사를 적으며 노래를 배웠던 것이다. 평범한 동요가 아니었고 처음에는 분명 전래동요로 시작했다. 도깨비 빤쓰는 튼튼하고 호랑이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노래를 부르며 반 친구 전체가 깔깔 웃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가삿말이 의미심장한 것들이 종종 튀어나왔다. 깊은 산 물고기가 살던 연못에 어느 날부터 물이 썩어 들어가서 물고기도 죽었고 그 연못에는 아무도 살지 못했다는 우울한 내용이었다.



한참 뒤 나중에 스무 살이 되어 대학교에 가서 선배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왠지 꽤 익숙했었다. 나는 04학번인데 사회과학대를 나와서 내 대학 생활동안 학생 운동을 하던 선배들의 흔적을 많이 보았다. 나중에 내가 배운 노래는 양희은의 <작은 연못>이라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참여를 늘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공부 잘하는 일부 아이들의 호응만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이 아니었다. 교실에서 외로운 아이가 없었다. 우리는 소외되는 아이들 없이, 모두 다 같이 잘 어울려 놀았다.


내가 다 자라서 엄마가 말씀해 주시길 담임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 대부분이 전교조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그분의 성함을 여태 기억해서 언젠가 교육청의 은사 찾기 페이지에서 검색해 본 적도 있었다.


선생님을 정말 좋아했던 나는 몇 년 전에 경기도의 어떤 초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을 하신 것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한 학기만 가르쳐주신 나를 기억하실까 싶어 연락은 드리지 못했다.




이 동네는 정말 여러 아이들이 있었다. 북한과 경계를 마주하고 군부대가 많고, 미군 부대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여기서 나와 비슷하게 이사만 다닌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세 달에 한 번씩도 전학 다닌다고 했으니, 1년에 한 번씩 학교를 옮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지역의 개발로 인해 갑자기 집이 부자가 된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이 아이들의 집에는 운전기사가 있었고 삐삐가 보급되던 시절 집에 휴대전화가 있다고 자랑했다. 룰라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을 좋아했고 나도 끼워주었으나 나는 영 따라가지 못했다.



공부에 흥미가 별로 없던 이 아이들은 나중에 뉴질랜드로 유학을 갔다고 들었고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이민을 실제로 가고 준비하던 집도 종종 있었으며, 악기 전공을 준비하던 친구들도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떤 친구 집에 처음 놀러 갔다. 단칸방 집이었는데 텔레비전 위의 가족사진 액자가 엎어져있었다. 그 친구는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아빠가 엄마 얼굴을 보기 싫어 사진을 엎어놓는다고 했다. 그래도 그 친구에게 소중한 엄마사진이었으니 아예 치우지는 못했을 터. 나는 그날 처음 이혼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관현악부가 있었다. 서울 학교에도 잘 없었을 규모의 관현악부였다. 나도 오래 배운 피아노를 그만 배우고 그때를 계기로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에도 스카우트나 아람단 활동 비용이 비쌌음에도 참여율이 높았다. 교내 스카우트 행사도 굉장히 성대하게 열렸다. 내가 다음에 전학 갔던 서울의 학교에서는 스카우트 활동이 형식적이었고 그 마저도 학업의 이유로 대부분 4-5학년까지만 하고 그만두었던 분위기와 대조적이었다.




당연히 나는 학교 생활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월말평가, 단원평가 같은 시험은 없었다. 학교 생활이 유치원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분명히 그때 체험한 경험은 지금도 행복하고 여태까지도 기억에 있을 정도로 강렬한 경험으로 또렷이 남아있다.


아쉽게도 이 즐거운 학교생활이 1학기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빠는 보통 근무지에서 1년을 채우셨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갑작스럽게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같은 반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 현악부와 스카우트 활동을 같이 하던 언니들까지 내가 학교를 떠날 때 운동장까지 나와서 교문을 나갈 때까지 울어주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거리가 가까운 서울로 이사 가니 연락을 잘할 수 있을 테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영원한 이별이었다.


즐거운 학교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어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곧 내가 열린교육과 행복한 교실을 마냥 긍정할 수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서울에서 만난 또 다른 환경은 열린교육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내가 앞으로 오래도록 당면할 냉혹한 현실의 시작이었다.


학교는 마냥 아이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과 행복을 배우는 작은 사회가 아니라, 도태되지 말아야 하는 경쟁의 장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곳이라는 걸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