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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Sep 03. 2024

1998 : 서울의 여중 생활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네에서 중학교에 진학했다. 교복을 맞추고 단발머리로 잘랐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귀밑 3센티가 두발 규정이었다.


한 학년에 15반이 넘게 있는 여자 중학교였다. 집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곳이었는데 학교가 워낙에 커서 우리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도 대다수 배정을 받는 곳이었다.



버스도 없어 집에서 15분 정도를 걸어서 다녔다. 같은 동네 친구들 둘셋이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열명 가까이 같이 몰려다니며 등하교를 했다.  


여자아이들만 한 반에 40명 모아놓은 여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우관계다. 소외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적극적이고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던지라, 시끄럽게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대신 2-4명씩 다니는 아이들의 여러 부류와 두루두루 친했다. 만화책과 키키 쎄씨 같은 잡지를 돌려보고 친구들과 쪽지라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천계영과 클램프 만화책 그림 같은 걸 따라 그렸다.




중학교 이후로 담임 선생님은 항상 남자선생님이셨다. 성적이 좋고 온순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들은 항상 나를 좋아했다. 선생님들이 반장선거에 내보내려고 하면 나는 질색했고 사양했다.


나는 주목받거나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앞서 전학을 다니며 주목받을 행동이 호감을 사지 못할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에게 학급일지를 매일 쓰고 사인을 받으러 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교무실에서 거의 매일 담임선생님과 스몰 토크를 했다. 평소에는 별 말없던 선생님과 나였지만, 따돌림 같은 심각한 사건이 감지될 때는 유심히 물어보셨다.



선생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어떤 아이들 두세 명은 내가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다며 뒤에서 뭐라고 했었던 것 같다. 언젠가 이 아이들과 싸우지 않고 무시하는 게 이기는 거라고 일기장에 적어놓은 걸 펼쳐 보고 깜짝 놀랐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나보다 그때의 내가 더 괜찮은 아이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12월생이라 학년 기말고사가 끝나면 생일잔치를 겸해 늘 햄버거집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고 뒤풀이를 했다. 엄마는 친구 서너 명과 밥 먹는 줄 알고 용돈을 줬는데 스무 명쯤 왔다니 당황하는 눈치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아이들끼리는 서로 친하지 않아서 그 어색함을 구경하는 것이 나 혼자 재미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학원에 다녀왔다. 학원 갔다가 집에 오면 10시 50분쯤이었다. 앞서 초등학교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시험기간에는 친구들과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한다고 폼은 잡아보았다. 처음 먹어본 자판기 믹스커피는 달달하고 맛있었다.


대입은 멀었지만 친구들끼리의 화제는 외고 입시였다. 내신이 들어가는 2학년이 되면 공부를 정말 잘해야 하는구나? 학원에서는 점점 다음 학년 선행 진도를 미리 나갔다. 나는 이렇게 별 일 없이 고등학교까지 학교생활을 하고 대학에 갈 줄 알았다.




중학교 생활이 순조로웠는데 1학년이 종업식 날 집에 돌아온 나를 보고 엄마는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또 이사를 간단다. 아니, 여기 정든 내 고향을 놔두고 나는 어디를 또 가는 거지? 이번에는 대전이랬다. 딱 1년만 다녀오면 된단다.



나는 내 친구들과 또 인사를 했다. 전혀 울지 않았다. 분명히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이 친구들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몇 달 뒤에 더 멀리 이사를 갔다.


이미 전학을 여러 번 다녀본 나는 새로운 학교에 간다는 것 자체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고, 별로 다른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또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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