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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Sep 10. 2024

1999 : 대전의 여중 생활

초등학교보다 중학교 전학은 정말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우리 가족에게는 아빠에게 기러기 생활을 한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아빠는 근무하는 지역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부모님에게는 주말부부의 선택지도 없었다. 그냥 아빠와 1년을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빠는 3년 이상 서울에서 일했지만 어느 해에는 아예 사무실에서 숙식했고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가 아빠를 만나러 주말에 사무실로 찾아갔다. 우리는 이미 기러기 가족처럼 지내봤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는 아빠와 떨어져 사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당시 나보다 부모님은 심적으로 정말 많이 힘드셨을 거다.


우리 가족이 전에 지방에서 살았던 곳은 작은 도시였다. 그런 곳에 비해 대전은 그래도 광역시고 큰 도시였다. 1년 정도 살다가 서울에 돌아가도 된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또 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연재 초입에 밝히지 않았지만 대전은 사실 나의 출생지다. 나는 첫돌이 지난 갓난아기 때 서울에 이사 와서 대전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부모님이 대전 출신이고 나의 친척들 절반 이상이 아직도 대전에 살고 있으니 연고지였다. 나에게는 명절이나 경조사 때 참석한 단편적인 기억뿐이라, 잘 알지 못하는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기분도 들었다.


내가 처음 전학 오던 날 서울에서 온 나를 반 아이들이 하나같이 신기해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사투리를 쓰는 거냐고” 물어봤다. 나에게는 전혀 위화감이 없는 말투였다. 부모님이 대전 사람인 나에게 충청도 방언은 네이티브 랭귀지였으니. 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돌아온 말은 “ 기~~ 야? (그러니?) ”였다.  




우리가 이사 간 곳은 당시 대전에서 신도시라고 불렀던 둔산동 쪽이 아닌 구도심의 작은 아파트 단지였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곳도 여중이고, 똑같이 단발머리 규정이 있고, 서울과 다른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전학 온 첫날 알게 되었다. 짧은 치마에 염색을 한 어떤 아이가 새 학기 첫날부터 학생주임이며 체육선생님인 담임 선생님과 다투더니 이틀 후 자퇴서를 냈다. 그때까지 퇴학을 말로만 들었지 처음 봤다.


서울에는 없던 담배 피우는 아이가 여기는 반에 여럿이었다. 중학생이지만 학원에 다니는 아이는 거의 없었고, 하교 후에는 다 같이 나는 처음 본 불량식품 같은 것을 사 먹고 시내로 놀러 다녔다. 집, 학교, 학원, 도서관의 패턴에 변화가 생겼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질이 나쁜 건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이 아이들이 더 계산적이지 않고 순진했던 기억이다. 다만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 엄마가 나중에 한숨 쉬며 말씀하시길 설마 이런 분위기일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단다.


그래도 나는 교우 관계에 있어서는 썩 잘 적응해 나갔다. 내가 그저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로 때깔이 나보였나보다. 같은 반 친구, 얼굴 모르는 옆반 친구, 1학년 후배한테까지 편지를 종종 받았다.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평범했던 나에게는 희한한 경험이었지만 나는 으쓱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이는 순간 비호감 내지 적대심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여전히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아이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다.


전학의 베테랑인 나에 반해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내 남동생은 정말 싫었던 기억이라고 지금도 회상한다. 이사를 오자마자 그 동네의 아무 이발소에 갔더니 쥐가 파먹은 듯 삐뚤 빼뚤하게 깎아놨다. 전학 간 첫날부터 서울에서 온 아이가 머리가 왜 그 모양이냐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단다. 이후에도 여러 가지 따돌림으로 학교에 가는 걸 굉장히 싫어했었다. 이래저래 전학은 참 어려운 것이다.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는 한 학년 학생 수가 700명쯤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누구나 공부를 열심히 하니 시험문제 하나만 틀리면 석차와 백분율이 요동을 쳤다. 나는 그리 열심히 준비하지 않았던 중간고사 성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러다가 서울대에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은 반에서 1등 해도 ‘충남대’를 가기 힘들다는 말을 했다.



문제는 집 근처에 다닐 만한 학원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과외를 받았다. 학원에 다니지 않아 불안했다. 내가 제대로 따라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학습에 구멍이 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아마 내가 그 학교를 더 오래 다녔다면 둔산동 학원가에 갔을 지도 모르겠다.


이점도 있었다. 주말에는 학교 추천으로 카이스트에 가서 영재교육이라는 것을 매주 참석했는데,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무슨 과학영재였겠는가. PC통신으로 원격교육을 했는데 PC통신 ID를 갖고 있는 게 전교에 나 혼자여서 간 것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인문계로 입시를 봤던 나에게 별로 쓸모없는 이력이 되었지만.


지방 간에 교육격차는 분명히 심각하게 존재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대입에서는 지역균형인재 선발제도까지 있을 정도다. 우리는 입시가 노력으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굉장히 공정한 제도라고 착각하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를 역차별이라고 부정하지만 나는 이런 온도차가 극명한 경험들로 그런 관점에 의구심이 든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며칠 뒤에 내가 그때까지 살면서 들은 말 중 가장 벼락같은 소리를 들었다. 아빠가 또 발령이 났단다. 이번에는 미국이었다. 황당해할 겨를도 없이 우리 가족은 나의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커다란 이민가방에 짐을 꾹꾹 눌러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4개월의 학교 생활을 끝내고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외국 학교는 전학이라는 개념이 아니기에 형식상 자퇴 후 편입하는 것이다. 나중에 대입에 필요해서 성적표를 떼러 갔는데 성적표를 자퇴생이라고 파쇄했다고 했다. 그 학교에서 외국 유학으로 자퇴한 사례는 내 전후로 하나도 없었고 맨 처음 언급한 문제적인 사례들 뿐이라. 그렇게 나는 중학교 2학년 학적 누락을 학교 과실인정 공문으로 대체했다.


네 달밖에 다니지 않은 학교였지만 친구들은 내가 떠날 때 많이 울어주었다. 그 때부터 였다. 이별의 순간 내가 눈물 한점 없이 친구들을 토닥이며 위로해주던게. 우리가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어도 가끔 추억하는 친구가 되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은 일일거라고.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혼자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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