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 조기유학은 선풍적인 유행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숙제로 홍정욱의 <7막 7장>을 읽고 독후감을 쓴 적도 있었으니.
실제로 그 반에서 나중에 홀로 영미권 보딩스쿨로 조기유학을 간 친구가 두 명 있었다. 아버지의 해외 주재원 파견이나 해외 학위취득을 목적으로 외국 생활을 경험한 친구들까지 따지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았다. 내가 강남 출신이 아닌 그저 서울의 평범하지만 교육열이 조금 있는 동네에 살았을 뿐인데도 그랬다.
그리고 아빠가 미국으로 발령나며 나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나중에 유학을 간 이 아이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았는데 어느새 연락이 끊겼다. 지금도 이 친구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유년기를 그것도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서 지낸 건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만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만큼 힘들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서 이사를 여러 번 다녀 어디를 가든 잘 적응한다고 생각했지만 해외 생활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백인들만 주로 사는 동네에서 학교를 다녔다. 히스패닉도 거의 없고 흑인은 한 명만 있었다. 10% 정도의 아시안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한국계가 제일 많고 중국계, 일본계 아이들이 소수 있었다.
로스앤젤레스는 한국사람이 많은 곳이다. 아버지의 전임자는 아이들의 영어공부를 위해 한국 사람들이 최대한 없는 곳으로 가라며 그분이 사시던 동네와 집을 추천해주셨고 우리 가족은 그대로 옮겨갔다.
확실히 나는 그 덕분에 영어는 많이 까먹었지만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고, 감수성 예민한 시절에 다녀온 탓에 사고방식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있다.
내 초창기 미국 학교생활이 왜 힘들었을까? 나는 처음부터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환상이 별로 없었다. 실제로 가보니 내 생각보다 더 했다. 그런 생각이 적응이 더 어렵게 해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의 속성 때문인지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는 그때 내가 거의 1년 동안 내가 아침마다 울먹이며 학교를 갔다고 기억한다. 나는 잠을 많이 못 자고 학교를 아침 일찍 졸면서 간 기억은 난다. 한국에서는 나름 우등생이었는데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바보가 된 느낌이 너무 싫었다.
거기에 한국에서 홀로 온 질이 좋지 않은 유학생 아이들로부터 그들과 똑같이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따돌림도 당했다. 이 아이들이 싫어서 ESL 클래스를 빨리 빠져나가려고 이 악물고 공부를 했다. 나중에 교포 아이들, 다른 아시안계 아이들과 교우관계를 확장하고 학교 생활에 대한 부담이 좀 나아졌다.
조기유학을 가서 힘들게 고생하며 성실하게 공부한 사례도 많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본 일부의 일탈에 대한 기억이 강렬해서 나는 지금도 조기유학에 매우 부정적이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의 유혹은 차원이 다르다. 이를테면 마약이라든가, 한국인 부모의 관점에서 기겁할 수준의 이성교제 등등이 그렇다.
미국의 공교육에 대한 큰 환상도 없다. 학교에서 별로 신경을 써주는 게 없고, 부모도 신경을 써줄 수 없고 자기가 다 알아서 해야 하기에 자기 주도성은 확실히 배울 수 있었다. 학생의 생각을 존중하고 한 가지 답만 강요하지 않으며 에세이와 리포트, 디베이트, 프레젠테이션 같은 형식을 두루 경험하는 문제 해결 위주의 커리큘럼은 좋은 분명 교육방침이다.
하지만 미국 교육 시스템도 입시라는 목적이 끼면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게 없어졌다. 게다가 여기는 SAT와 AP 학점 관리 외에도 대외활동, 체육활동 등 준비해야 할 항목이 더 빼곡했다.
체육에 소질이 하나도 없던 내가 언어의 장벽보다 더 힘들게 느껴진건 체육시간이었다. 매일 1마일씩, 한국 운동장 8바퀴 거리를 뛰는 게 몸풀기에 불과했던 혹독한 체육시간이 제일 싫어서 학교 가기가 싫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어른이 되고 아이를 키우며 돌이켜보니 이 체육시간이 내 12년 학교 교육 중 가장 의미 있었다. 더 말하고 싶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니 언젠가 천천히 풀어보겠다.
미국에서도 나는 계속 사교육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갈 것을 대비해 개념원리 문제집과 수학의 정석 책을 출국할 때 이미 사들고 갔었다. UCLA로 어학연수를 온 한국인 대학생에게 수학 과외를 받았고, 미국 학교 수업 때문에 미국 수능시험인 SAT 학원과 영어 에세이 수업을 들으러 한국인이 운영하는 학원에 다녔다. 내가 공부했던 양은 오히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보다 훨씬 많았다.
귀국할 시점이 다가오며 부모님은 주변에서부터 나를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시키라는 제안을 많이 받으셨단다. 나는 무조건 귀국하겠다고 했다. 우선 나는 미국에 눌러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20년도 전 일이라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이 피상적으로 멜팅팟(melting pot)을 지향하는 의미는, 현실이 결코 바뀔 수 없는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인종 간의 문화적 차이는 생각보다 극복하기 힘든 차이다. 그것이 인종차별로까지 이어지기에 안타깝게도 이방인은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 것이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한국보다 미국생활이 잘 맞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나는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한국 사람의 정서와도 점점 멀어지는 이방인의 정서가 짙어져가고 있었다. 내가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을 것 같은 외로움은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하고 안전한 곳에서 사는 심리적 안도감이 그리웠다. 어쨌든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와 별로 맞지 않았다.”라는 게 내 2년 6개월의 미국 생활의 결론이었다. 죽어도 내 뼈는 고국 땅에 묻히리. 17살이었던 내 일기장에 그렇게 쓰여있다.
그렇게 나는 귀국길에 올랐다. 그쯤이 되어서야 캘리포니아의 1번 국도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이 그렇게 아름다운 건지 눈에 들어왔다. 울먹이는 친구들과 인사하는 과정은 외국에서도 앞선 과정과 똑같았다. Why don’t you cry?라는 말에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메일주소를 주고받고 아이들을 토닥여주었다.
나는 귀국하고 다시 한국의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드디어 8번의 전학 끝에 드디어 나의 12년 초중고 시절의 마지막 학교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