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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Sep 24. 2024

2002 - 2003 : 특목고와 대치동 생활

12년의 학교 교육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에 온 내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미용실이었다. 밝게 염색한 머리를 까맣게 염색했다. 두발 길이규정이 없어서 머리는 자르지 않아도 된단다. 미용실에 같이 간 엄마는 개털 같은 저 머리가 이제야 사람같이 단정해졌다며 속 시원해했다.


아침에 무얼 입을지 고민할 필요 없이 교복을 입고 집 학교 학원 독서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 나는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나는 차라리 내가 뭘 결정할 필요가 없고 공부라는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는 그런 환경이 낫다고 생각했다. 되고픈 것을 형식적으로 묻고 점수에 맞춰 지원하는 우리나라의 입시제도가 차라리 편리해 보였다.



나는 외국어 고등학교를 다녔다. 한국 학교가 훨씬 익숙한 나는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이른 아침 매점에서 2% 부족할 때 나 데자와 캔음료수를 수면이 부족한 풀린 눈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공부할 때는 각자 알아서 하며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어느 날 교내 논술대회가 있었다. 워낙 잘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써서 냈는데 입상했다. 넌 이런 거 상 받지 말고 영어나 열심히 해서 대학가렴. 이런 말들이 오가니 친한 친구들은 상처받지 말라고 했다. 상처라기 보다도 외국에서 살다 온 나에 대한 사람들의 이중적인 시선을 냉정하게 곱씹어보는 계기였다.


진짜 긴장감은 대입이 다가올수록 고조되었다. 내가 다툼에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수능이 다가올수록 어디선가 싸우고 날이 선 소리들이 들려왔다. 동료에서 경쟁자가 된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예민한 서로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점점 말을 섞지 않았다. 배고프다 졸리다 피곤하다 같은 원초적인 말 이외에는. 경쟁이란 건 원래 원초적인 것이지만. 그렇게 다들 고독해져 갔다.


나는 강남구에 살지 않았지만 학원을 대치동으로 다녔다. 특목고에 가는 것, 대치동에 가는 이유는 비슷하다. 엄마들은 입시정보, 학생들은 나와 비슷한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보고 자극받으러 가는 곳이다.


나는 대치동에서 외국 여기저기 떠돌며 생활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이 아이들과 나는 삶에 대한 관점과 정서가 많이 비슷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 이 친구들이다.



하지만 대치동은 나에게 하루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이상한 곳이었다. 그 당시에도 의대가 아니면 대학도 아니라고 폄하하며 의대를 목표로 공부하던 아이도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온 가족이 서울대를 나왔기 때문에 서울대에 합격하지 않으면 나가 죽을 거라더니, 죽지는 못하고 재수, 삼수를 택한 아이도 기억난다.


입시가 다가올수록 소위 족집게 과외라는 것은 시간당 백만 원 천만 원까지 호가했다. 나는 대치동까지 오가는 것도 힘들어서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험에 반드시 나온다는 그것들이 당락을 좌우할 것 같더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렇게 결정적이었나 싶다.


이래저래 굽이굽이 한 12년의 끝이 보이고 무난하게 지나가는 듯했지만 큰 문제가 생겼다. 내가 목표로 하던 소위 스카이 라인 대학교는 황망하게도 다 떨어졌다. 친구들도, 학교 담임선생님도, 학원에서도 불이 나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고 일주일 동안 핸드폰 전원을 끄고 살았다.


노력을 의심하지 않더라도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 입시였다. 하지만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했는지 자책이나 자기혐오에 빠질 시간조차 없었다.



대치동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더 보내야 할까? 불합격의 충격이 컸지만 생각보다 별로 큰 고민 없이 재수를 선택하지 않고 대학을 갔다. 학벌이 다 일 것 같으면서도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의 사회생활을 통해 듣고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언제나 그 근원을 잘 모를,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힘들었지만 나는 어느 환경에 던져져도 잘 적응하고 잘 살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도 내 삶의 모토는 “닥치면 다 한다 “는 말이다.


그리고 그때의 입시 실패가 내 인생에 정말 큰 약이었다는 걸 깨달은 게 불과 그때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최근이다. 흔한 말이지만 정말로 인생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고 학벌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때로는 인생의 최고의 불행은 정말로 소년등과이기도 했다. 20여 년간 직접 본 것, 그리고 건너들은 이야기들로 이따금씩 내 마음은 불편했다.


우리나라 입시는 조금의 실패도 인정하지 않기에 이로써 회복탄력성을 키울 수 없다. 실패를 겪어봐야 탁탁 털고 일어나는 방법도 배운다. 1등부터 꼴등까지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12년 교육의 결과라는 건 씁쓸한 일이다.



그 후로 나는 대학에서 성실히 공부했다. 1학년이 끝나며 점수에 맞춰 전공을 정했고, 별 흥미 없었던 전공 공부를 견디며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며 졸업했다. 그렇게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했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며, 어느새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 갔다.


지난 12년 간의 와인딩 로드를 지나온 기억들은 사회생활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 기억들을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 까지는 별로 꺼내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내 어린 시절을 무수히 다시 꺼내보고 복기해야 했다. 그게 정답이 없는 수수께끼 같은 양육에 있어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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