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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Oct 08. 2024

2024 : 지금 우리의 현실은

우리는 무엇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나


또 내 인생의 비디오테이프를 훌쩍 앞으로 감아본다. 갓난아기였던 첫째 아이는 훌쩍 자라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내가 30여 년 전에 입학했던 그 학교의 학생이고 나는 학부모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우리 아이의 교실 뒤에 붙어있는 어여쁜 문장을 보았다.


우리는 모두 다 꽃이야.



지금의 학교는 내가 다녔던 옛날 그 학교와 다른가? 그 경쟁으로 모두가 불안해하던 사회의 축소판인, 모두가 웃음을 잃어갔던 그 학교 말이다. 지금의 학교는 아이들에게 옛날과 다른 부분을 분명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괴리만 더욱 벌어졌음을 느낀다. 이상과 현실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그 사이 속에서 아이들과 부모들의 혼란과 좌절은 더 커졌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는 엄마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시기 중 하나다. 초등 입학은 엄마들에게 기준점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한글을 몇 살에 떼야하는지 생각해 보자.


초등학교에서는 입학 전에 한글을 뗄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수학 단원 평가의 문제를 보고 역시나 싶었다. 한글을 떼지 않은 아이는 문제를 바로 읽고 풀 수 없다.



아무리 학교에서 가르쳐준다고 하더라도, 부모들에게 중요한 건 내 아이의 결과치와 성과다. 정확하게는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지 않을지, 다른 아이보다 잘하는지 같은 비교적이고 상대적인 성과를 기대한다.


이런 식의 모순들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우리 교육의 목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입시를 위한 서열화다. 결국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변별력만 강조한다. 여러 가지 다양한 기준점을 제시해도 결국 정해진 자리 안에 살아남는 것이 목표다.


여기서부터 우리들의 인생의 정답은 한 가지가 아니지만 내 생각이 나 자신조차 틀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학교는 모든 불행과 비극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학교는 배우는 곳이 아니라 각자도생의 경쟁의 장이다. 사교육의 분위기는 학교와 아주 대조적이다.


아이들은 더욱 어릴 때부터 빡빡한 쳇바퀴를 힘겹게 돌린다. 저학년들도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학원 스케줄이 차있다. 어린아이들은 주말에도 학원수업을 들으러 다닌다. 직장인들도 대부분 주 5일제로 일하고 주말에 쉬지만 아이들과 학원가는 예외다.


미취학 아동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말까지 유행한다. 일부 영어유치원의 입학시험은 미국에 사는 유치원생도, 초등학생도 모를 단어가 나온다. 과도한 학원의 마케팅은 괴물 같은 시험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경쟁은 치열해지고 불안은 대물림된다. 세상은 급변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한다고 하지만 바뀌지 않는다. 불안에 떨고 있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커져도 수동적이고 고루한 교육방식과 사람들의 사고를 감히 바꿀 용기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떤가? 우리의 불안함을 고스란히 투영된 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의 아이들은 행복지수를 평가하는 설문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답하고 있다.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본다. 나는 다양한 학교들 속에서 무엇을 배웠나? 나는 운이 좋게도 다양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것을 배우고 자랐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가장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이 무엇이었나?



나는 한 때 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들었던 풀벌레 소리나 다양한 꽃과 나무들,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봤던 게 가장 쓸모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겪은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세상도 마찬가지다. 입시에 그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과 비교해서 학벌도 개인주의와 맞물려 절대적인 요소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대학에 입학하면 끝이 아니었다. 그 광경을 목격했기에 내 또래 세대들은 이른바 스펙 쌓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나에게 별로 쓸모없던 건 영어였다. 직업과 포지션에 따라 영어의 쓰임새는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느끼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나는 심지어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남편의 경우조차 부족한 부분은 통역이 잘 대체해 주는 모습을 보며 영어의 비중도 역시 바뀌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가장 핵심은 다양한 상황에 대한 판단능력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가끔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창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런 능력의 바탕은 다양한 경험이다.


우리의 목표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상명하복이 중요한 조직문화에서는 말을 잘 듣는 게 미덕이라 주입식 교육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직장의 개념은 무너지고 있고, 회사가 나를 영원히 책임지고 보호해주지 않는다. 언젠가 회사를 벗어나고 평생 일해야 될지 모르는 세상에서 누구나 언젠가는 풍파를 고스란히 맞아보는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경험은 상황판단과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험의 부재는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잣대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원 없이 경험하고 탐색하고 진취적으로 도전해야 했다. 경험이 부족하면 세상이 요구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때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고 깨닫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학원 뺑뺑이 같은 정해진 틀 안에서 스스로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온실 속에 화초같이 자라면,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 이것이 내가 요즘 시쳇말로 현타가 오는 이유다.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이 다양하고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을까?


부모가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 주는 건 한계가 있다. 학교는 또래들을 모아놓은 작은 사회로서 같이 이런 기능을 수행해야 하지만 우리의 학교는 그런 모습과 거리가 아직도 상당히 먼 것이 현실이다.




내가 브런치에 일련의 글들을 써보고 싶어진 이유는 나조차 지금도 불안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며 내 생각을 정리하고 방향성을 찾고 싶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경험을 했겠지만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자랐기에 이게 나만의 고민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어떤 가치를 제시하고 물려주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아이를 키우기 힘들다고 하는 이유,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며 어떻게 아이들과 살아갈지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과연 찾았는가? 정해진 답이 없는 이 문제에 대해 지금 내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단어는 행복이다.


정확하게는 부모가 행복을 마련해 줄 것이 아니라, 행복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의 여정을 함께하는 과정이다. 때로는 돌아가고 어려움을 만나겠지만 그것만큼은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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