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사교육 쳇바퀴에 들어간 다람쥐
1995년 8월이었다. 서울로 다시 돌아온 우리 가족이 간 곳은 예전에 내가 살던 5층 짜리 아파트 단지가 아닌 그 옆 동네였다. 새로 들어가는 우리 집은 15층 고층 아파트 단지의 30평 대 아파트였다.
나중에 들은 사연은 우리가 1992년에 지방으로 이사 계획이 잡힌 때 마침 재건축 진행 이야기가 나왔고 엄마는 바로 그 집을 팔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옆 동네의 평수 큰 아파트를 저축한 돈을 보태 바로 매수했다. 그곳이 정말로 재건축에 착수할 때까지는 그 후로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우리 가족의 오랜 방랑생활이 끝난 듯했다. 이삿짐이 들어오기 전에 네 식구가 합심해 집을 꼼꼼하게 쓸고 닦았다. 엄마와 아빠도 이사를 다닌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을 것이다.
청소를 끝낸 그 집 거실에 앉았고 아빠가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이사를 가지 않을 갈 거고, 이 집에서 사위와 며느리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가끔 이 일이 생각나 이 말을 우리 부모님께 하면 기막혀하신다. 우리는 그 후로 서울을 또 떠났고, 거기에 미국까지 다녀왔다.
나는 4학년 2학기 시작과 동시에 전학 수속을 밟았다. 서울에 내가 전학 온 학교는 개교한 지 5년이 안 된 학교였지만 벌써 한 학년에 12반까지 있었던 큰 학교였다. 시설도 차원이 달랐다. 전교생이 급식을 했으며 석유난로는 없어졌다.
전학 간 우리 반의 담임선생님은 40대 남자선생님이었다. 지금도 성함을 똑똑히 기억하지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이 분은 전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당시는 체벌이 상당히 성행했던 시기였다. 누구나 학교에서의 체벌에 대한 기억은 있을 것이다. 자세한 묘사는 읽는 사람들의 PTDS가 우려되어 생략하겠지만 그분은 내가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 없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을 가가멜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가가멜과 스머프들이었다. 실제로 학년 말에 학급 교지를 만들고 제목을 투표로 붙여 <가가멜과 스머프>로 정하려고 했지만, 선생님은 교지 제목을 <천사들의 합창>으로 고쳐서 발행해 주셨다.
전학 왔던 나는 여자아이고 맨 앞에 앉을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맨 뒷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일단 자리가 남는 뒷자리에 앉게 하더니 거기가 학년이 끝날 때까지 내 자리였다. 성비가 맞지 않는 그 시대에 맨 뒷자리는 짝꿍 없는 키 큰 남자애들끼리만 모여있는 곳이었다.
이 녀석들도 여자아이인 내가 끼니 당황하는 눈치였다. 쉬는 시간에 자기들은 우유를 빨리 마셔서 우유갑을 모아 1등으로 내야 한단다. 이 녀석들 덕분에 싫어하는 우유 한 팩을 늘 10초 안에 다 마셨다. 빨리 마실수록 박수를 쳐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틈만 나면 운동장에 나가서 공차기만 하는 녀석들과 얼마나 친해질 수 있었겠는가. 여자아이들은 보통 자리 주변 아이들과 쉬는 시간에 말을 시작하며 친해지는데, 나는 한참 동안 외톨이였다.
이 분은 아이들을 성적순과 집안 환경에 따라 철저히 차별했다. 반편성이 우연인지, 선생님이 일부러 모아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정말로 이 반 아이들이 다른 반에 비해서도 유난히 공부를 다 잘했다.
훗날 이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아이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판사가 되었고, 나중에 그 반 출신 다른 친구들의 후일담을 들어보면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로 쳐주는 곳으로 진학한 친구들이 열 손가락쯤 되었다.
부모의 직업은 전문직보다 대학교수, 대기업 직원, 은행원, 공무원같은 월급쟁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좀 부유해 보이는 친구는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고 했다. 이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고 십중팔구 미국이나 캐나다의 보딩스쿨로 조기유학을 갔다.
내가 강남구 8학군 지역에서 학교를 나온 건 아니다. 다만 그 학교가 서울의 평균적인 교육열보다 약간 높았을 수 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다른 학교로 배정받는 아파트 단지나 심지어 꽤 멀리서도 위장전입을 하던 사례가 종종 있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가 다 고만고만했을텐데 그때는 그랬다.
3년을 시골에서 살다 온 나는 시골뜨기였다. 시골에 살며 피부는 까맣게 탔고 하얘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도 처음에 나를 그리 보는 게 어린 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일기장을 몇 번 내고 나는 선생님의 관심에 들었다. 첼로를 배운다니 나는 선생님이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나를 대단히 추켜세워주고 칭찬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체벌을 유난히 당하지 않는 학생이 되었다는 의미다.
우리는 그분의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정말로 많이 맞았다. 특히 음악에 집착이 심해서 노래를 동요같이 잘 부르는 아이는 공부를 못해도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반 출신은 나중에 고학년이 되어서도 리코더를 빼어나게 잘 불었는데 씁쓸하지만 그건 맞아가면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4학년 내내 숨도 못 쉬고 학교를 다녔다. 5학년이 되고 6학년이 되어 담임 선생님은 바뀌어 숨 틀 구멍은 있었다. 하지만 앞서 서울의 선생님들은 뭔가 전부 비슷했다고 적은 적이 있었다. 내가 그런 분들만 만났을 수도 있지만, 내가 겪은 서울의 선생님들은 내가 그동안 경험한 지방에서의 선생님들에 비해 아이들에 대한 열정이 적어 보였다. 뭐랄까 그분들은 가르쳐 주시기보다 아이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이었다.
시험이 없었기에 오히려 선생님 마음에 드는 일이 더 중요했었다. 그건 아이들만 보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학교에 한 번도 찾아가지 않던 우리 엄마도 한숨을 쉬며 선생님을 뵈러 갔었다.
그리고 당시 교육 기조로 초등학교에서 시험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시험을 보는 방법은 존재했다. 이 학교는 교내 경시대회가 많았다. 수학경시대회, 교내 논술대회, 영어 경시대회도 있었다. 1988년생부터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웠고 내 나이는 해당 사항은 아니었지만 이미 학교에는 영어경시대회가 있었다. 영어 경시대회 생기기 전에도 반에서 절반 이상은 원어민 영어학원에 다니고 과외도 받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영어학원에 가지 않았다. 학교 영어 경시대회를 봤는데 원어민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내가 반에서 제일 좋은 점수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수학이었다. 그때도 수학을 선행진도를 몇년 어치를 빼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나는 교과서 진도 수준의 학습에도 구멍이 크게 뚫려있었다. 내가 이전 학교에서 예정된 1년을 다 채우고 서울에 왔다면 나는 수학의 구멍을 메우는 데에 최소 1년을 넘게 더 고생했을 것이다. 엄마는 더 늦지 않게 서울로 들어온건 천만다행이라고 까지 말했다.
당시의 초등학생까지 입시 위주의 사교육에 물들었다며 비판조로 뉴스에 종종 나왔다. 나도 사교육이 무조건 나쁜 건 줄 알았을 정도다. 엄마는 결국 나를 초등학교 5학년 때 수학 학원에 보냈고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수학에 대한 공백을 매우는데 6학년때까지 고생했으니 꽤나 오래 걸렸다. 학원에서 집에 돌아오면 10시쯤이었고 숙제를 다 하고 자면 11시였다.
나는 서울에서 친구들과 잘 지냈다. 한 학교를 1년 이상 다니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본이 말수가 많지 않았고 활달하게 주류로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다. 연예인을 따라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들보다 만화책을 보는 아이들과 친했다. 차라리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워크맨으로 라디오를 듣는 것을 좋아했는데 또래 여자아이들의 보편적인 취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맘때 쯤에는 성별을 철저히 나눠 노는데 나는 컴퓨터를 잘 다뤄서 남자아이들과 더 잘 지냈다. 주로 게임을 디스켓에 카피해서 교환하고 게임잡지를 같이 보며 쌓은 우정들이었다.
집, 학교, 학원을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었다. 언젠가 치뤄질 입시라는 레이스에서 이겨야하기에 우리는 쳇바퀴 속에서 일찍부터 훈련하는 것이었다.
학원 다니느라 시간이 맞지 않아 친구들과 놀 시간도 없어져갔다. 여기는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려니. 곧 중학생이 될 테니 이런 생활이 재미없다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나는 한 곳에서 학교를 2년 6개월이나 다니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내가 시골에서의 낭만을 망각한 서울의 초등학생이 되었고, 그 동네에서 그대로 중고등학교까지 나오고 대학까지 평범하게 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1년 뒤에 지방으로 또 이사 갈 줄 알았던가? 미국까지 다녀올 줄 알았던가? 얄궂은 일들이 한참 남아있을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