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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Jul 23. 2024

1987 - 1992 : 서울

아직도 그 시절은 응답할 수 있을까


<응답하라 1988>를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을 것이다. 이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로 종영한 이유는 지금과 대조되는 그때의 이웃 문화를 잘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도 그 시절을 살았다면 그때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 시대도 그 드라마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은 아파트에서 사회 초년생인 아빠의 적은 월급으로 아껴 살았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가족뿐만이 아니라 이웃과 친구들로부터 사랑받던 기억도 그 행복에 기여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라 그 시절의 좋은 기억만 남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억은 실제 경험에서 비롯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나는 1988년에 만 36개월이 안된 4살이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당시 4살이었던 나는 그때를 기억한다. 가장 기억나는 건 한 여름의 가스보일러 공사다. 만삭의 임산부였던 우리 엄마는 연탄아궁이를 빼고 가스보일러 공사를 계약했는데 3일 이면 끝난다던 공사가 한 달이나 걸렸다. 온 가족이 마르지 않은 바닥 시멘트 냄새를 맡으며 난민같이 살았던 기억에 나는 아직도 시멘트 냄새에 묘한 향수를 느낀다.


88 서울 올림픽도 내가 그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온 동네가 야단법석이었다. 도로마다 걸려 있었던 알록달록한 만국기. 그리고 올림픽이 한창이던 그때 태어난 내 동생. 침대가 아닌 온돌마루였던 산부인과 병실에 누워있던 우리 엄마. 축하선물로 병실에 놓여있던 그때 귀했던 바나나와 후르츠칵테일이 든 과일바구니 선물세트를 뜯어먹은 것. 그 장면을 정말로 기억하고 있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5층짜리 18평 아파트였다. 우리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던 1980년대에는 이주 수요로 인한 주택 공급이 한창 이루어지던 때였다. 이웃들 중에 원래 고향이 서울인, 진짜 서울 사람은 내 기억에 없었다. 그들 역시 도농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우리 가족과 비슷한 사람들이었고, 부모님과 동향인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한집에 아이는 보통 둘이었다. 아들 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던 시대였다. 동네 아이들은 거의 내 또래였다. 부모님들끼리 나이도 비슷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같이 사는 집은 아빠가 그 집의 첫째아들이랬다.


그러니 이웃들끼리 자연스럽게 왕래했다. 이웃집에 음식을 나누고,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의 집안 사정까지 다 꿰었다.


나는 이웃집 친구들과 언니들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고 어울렸다. 우리 집이 아닌 이웃집에서 만화영화를 보다가 저녁까지 같이 먹고 오곤 했다.가족이 다 같이 먹는 상차림에 숟가락 젓가락만 더 가지고 오면 된다고 했다. 그 집 아저씨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안녕히 계세요”라고 깍듯이 인사하고 우리 집에 돌아왔다. 친구들도 우리 집에서 똑같이 하고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집 밖만 나서면 또래 친구들이 바글바글했다. 창문을 향해 “00아 놀자!” “XX야 놀자!”를 큰 소리로 외치면 여러 친구들이 바로 집에서 튀어나왔다. 아파트 단지에는 아이들이 뛰노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바닥에 사방치기 하려고 낙서하고, 공기, 고무줄놀이를 동네 언니들을 따라 배웠다.


나보다 좀 큰 오빠들은 아파트단지 공터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종종 깨 먹었다. 우리는 해 질 녘까지 그러고 놀았다. 그래도 아무도 시끄럽다고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되었지만.




결혼 전 유치원 교사로 일했던 우리 엄마는 기본적으로 교육열이 있는 분이셨다. 우리 집에는 유아용 교구도 많고 책도 정말 많았다. 한글을 뗀 나는 유치원에 다녀오면 아이템풀 학습지를 풀었다. 공문 수학 선생님도 일주일에 한 번 오셨다. 아파트 상가에 있는 미술학원과 발레학원을 다녔고, 가정집에서 하는 피아노 교습도 다녔다. 피아노 선생님과 그 집 딸인 서울대 피아노과를 다니던 언니가 나를 너무 예뻐해서 그 집에서 한참 놀고 종종 간식과 밥까지 먹고 왔다.


그렇다고 엄마가 나를 무작정 공부로 푸시하는, 소위 말하는 극성 엄마까지는 아니었다. 공문 수학의 반복 연산이 지겨워 힘들어하니 엄마는 그냥 과감히 그만두게 했다. 학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을 열심히 찾아가지 않았고, 나중에 초등학교 이후에 학원도 내가 알아봐서 엄마에게 등록해 달라고 할 정도였다. 엄마는 확실히 치맛바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엄마가 그렇게까지 학습을 푸시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공부만큼은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매사에 호기심이 많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여기서 미리 복선을 하나 깔아야겠다. 나는 사실 엄마의 기대만큼 공부를 잘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이 많던 그 동네에서 국민학교를 입학했다. 내가 기억하는 첫 학교의 모습은 아이들이 바글바글 많은 학교였다는 점. 1학년에만 10개의 반이 있었고 한 반에 38명이었다. 교실의 수가 부족해서 우리 반 간판에는 1-1과 2-1 두 개가 달려있었다. 1학년은 오전수업, 2학년은 오후 수업을 하는 2부제였다.


당시는 아이들이 많고 학교가 부족한 시절이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보다 4명이 더 많아 키가 커서 뒷자리에 앉은 남자아이들 4명은 서로 짝꿍이었다. 그때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둘씩 짝을 지어 교실 책상에 앉았다. 학교 폭력을 우려하여 한 명씩 떨어뜨려 앉혀놓는 지금과 대조적이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짝꿍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김주현이라는 그 아이는 입학식날 다른 남자아이 얼굴을 때려 코피를 터뜨렸다. 그런 아이와 내가 짝이 되어 엄마는 입학식 날부터 아연질색했단다.


정작 나는 그 아이와 한 학기 내내 별일이 없었다. 책상 한가운데 연필로 금을 긋더니 거길 넘어오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그리고 정작 선생님이 짝꿍 손을 잡으라고 하면 부끄러웠는지 손 대신 옷소매만 내밀던 나름 수줍은 아이였다.



그렇게 1학년 1학기가 끝났다. EBS 교육방송을 보며 탐구생활을 한창 하던 8월이었다. 어느 날부터 엄마는 집안의 물건을 다 쏟아내고 정리하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때는 포장이사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거의 한 달 내내 꼬박 이삿짐을 쌌다.  우리 가족에게 올 것이 왔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A라는 지역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그 동네는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내가 5년 넘게 산 곳이었다. 나는 그 후로 유년기에 5년 이상 산 곳이 없다. 이웃들과 친구들과 인사를 했다. 정이 들었다는 개념조차 몰랐다. 그리고 그때는 그것이 영원한 작별인지 몰랐기에, 그저 웃으며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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