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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놀이

학원 안 가고 집에서의 영어학습법

집안을 정리하다 보니 아이들 어릴 적 열심히 읽어주던 영어책들이 눈에 띄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여러 번 뽑아 보던 책인데 이젠 전혀 읽지 않는다. 계속 책꽂이에 두는 것은 자리만 차지할 뿐 다시 볼리 없다. 책을 정리하며 훑어보니 동화책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아이들이 모르는 단어도 상당히 많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엄마가 영어동화책 정리할 건데, 영어공부도 할 겸 번역 놀이해보면 어떨까? 엄마가 의뢰인이 되고 너희들이 번역가가 되는 거야"

"번역가가 뭐야?" 딸이 묻는다.

"응, 번역가는 외국책을 한국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한글로 바꿔주는 사람이야. 출판사에서 번역가에게 책을 번역해 달라고 요청하면 번역을 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지."

"우리가 번역하면 엄마도 돈을 줄 거야?" 요즘 사고 싶은 악기를 위해 열심히 용돈을 모으고 있는 아들이 물었다.

"그럼~ 엄마도 돈을 지불해야지. 번역가님! 얼마를 주면 될까요?" 나는 장난스레 말했다.

"한 권에 500원" 딸이 금액을 제안했다.

"에이, 500원은 너무 적다. 그럼 분량이 적고 쉬운 책은 1000원, 단어도 좀 찾아야 하고 분량이 좀 되는 건 2000원, 시간이 좀 걸리는 건 3000원 이상 어때?"

"좋아요!!" 두 아이 모두 동시 대답한다.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학원을 싫어하는 두 아이의 영어학습이 은근 걱정이 되었었는데 꿩 대신 닭이라고 우리의  번역 놀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코로나 19 생활 방역으로 3주에 한번 1주일 학교를 간다. 학교를 가지 않는 2주는 온라인 수업의 연속이다.

낮 동안 온라인 학교 수업을 끝내고 8교시(오후 4시) 번역 수업으로 정했다. 물론 이 시간은 아이들이 정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잘 지켜지진 않았다. 큰아이의 경우 온라인 수업이라 하더라도 오프라인 수업처럼 체계적으로 진행이 되었기에 6~7교시까지 수업을 하고 나면 녹초가 되었다. 여러 번 진행해 보니 번역하는 시간은 좀 더 자유롭게 정하도록 했다.

노트에 동화책의 영문을 옮겨 적고, 그 옆에 한글로 적었다.

이 시간만큼은 아이들이 번역하는 거라 "번역가님~"이라고 호칭을 불러주었다. 의외로 흥미 있어했고, 재밌게 시작했다. 여러 번 읽었던 내용이라 흐름도 알고 있었고, 단어도 학교에서 배운 단어들이 제법 나왔다. 하지만 내용이 많아지면서 쉽지만은 않았다. 영어동화책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번역을 하다 보니 잘 모르는 단어가 많았다. 단어를 찾는 일이 숙련되어있지 않아서 구글 어플, 영어사전 등을 이용하여 단어를 찾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루는 책 한 권을 가지고 끙끙거리며 좀처럼 진행이 느린 아들에게 물었다.


"소리야, 번역가 놀이 어렵니?"

"힘들지" 하고 아들은 당연한 듯 대답했다.

"잘 안 되는 게 있어? 한 권 번역이 너무 오래 걸리네"

아들은 투정하듯 답한다

"학교 수업만 해도 지치는데 영어 번역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나도 쉬고 싶고 놀로 싶다고."

"글치. 힘들지. 엄마도 힘든 거 알아. 그런데 네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한 권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아. 이거 하고 놀아도 시간은 충분한 거 같은데..."

"......"아들은 말없이 듣고 있다.

"엄마는 번역가 놀이하면서 용돈도 벌어주고 싶고, 어차피 해야 할 영어니까 재밌게 하면 좋겠다 생각했지. 그런데 힘들었구나. 또 다른 이유는 없어?"

내 말에 아들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망설이다가 말을 꺼낸다.

"그리고 나 자신한테 짜증 나"

나는 아들의 짜증스러움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무엇이 짜증 나는지 물었다.

이유인즉 영어동화책인데 단어를 몰라 한참 찾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실망스럽고 짜증이 났다고 한다. 나는 아들의 잘하고 싶은 마음을 읽었기에 네가 정한 것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단어를 잘 모르면 힘든 게 당연하다고 안심을 줬다. 처음엔 찾아야 하는 단어가 많지만 더 많은 단어를 알게 되면 재밌어지고, 단어를 찾는 시간도 줄어든다고 말해주었다.


번역가 놀이를 시작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아이들은 교과서 위주의 학습을 하지만 단어를 외워야 하는 부담으로 단어 공부를 싫어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이들의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되었기에 차근차근 쉬운 것부터 찾아가며 영어의 세계를 알아가고 있다.


한 권 영어동화책 번역이 끝나면 번역료를 봉투에 담아 준다.


참고: 두 아이에게는 용돈을 별도로 주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합의하여 회사 놀이를 하고 있고, 회사구성원으로서 역할에 따른 급여지급(용돈)을 하고 있으며, 아이들이 해야 할 일에 일일이 보상을 하는 것은 자칫 잘못된 경제개념을 갖게 되므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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