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는 요리하는 작가다

' 첫 강의, 80명 요리 수업하고 기절하다 '

보증금 2천에 월세 20만 원, 

방 두 칸의 다세대 주택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늘 빠듯한 살림에 저축까지 하며 사는 일은 버거웠지만 누구나 그렇듯 우리에게도 꿈꾸는 미래가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맞벌이도 잠시 첫 아이에 이어 2살 터울의 둘째가 태어났다. 첫아이를 임신하며 나는 퇴직을 했고, 남편은 외벌이로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은 살림이 마이너스라 주말이면 공사장, 대리운전까지 쉴틈이 없었다. 주말에 아이들과 놀고 싶은 것도 참고 투잡으로 일하는 남편을 언제까지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생활에서 아끼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필요한 것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유모차, 옷가지들을 지인들에게 물려받아 사용했지만 언제까지 받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보 나도 이제 아이들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알아볼게요” 남편은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더니 아직까지는 괜찮으니 두 아이에게 조금 더 신경 쓰라는 것이다. 걱정이 된다면 직장을 어떤 곳을 다닐지 좀 더 고민해 보라는 것이다. 당연히 첫 아이 임신 때까지 다녔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교사를 할 꺼라 생각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직장에 머물 근무시간이 아침 8시~저녁 7시까지니 아이들은 새벽 일찍부터 늦게까지 기관에 머물러야 한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했다. 늦게까지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이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전업주부인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잠깐씩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데 머리에 반짝하며 광선이 스쳐 지나간다. 둘째 산후조리 때 TV를 통해 보았던 요리 지도사다. 흔히 요리 지도사라고 하면 성인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강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어린이, 장애인, 학생들 다방면에서 요리를 가르친다고 했다. 나는 기다릴 것도 없이 자격증 취득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고, 실습을 거쳐 요리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해서 바로 강사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강의를 시작할 만큼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지만 돌다리도 두드리며 가야 하기에 어시스트를 신청했다. 요리 어시스트는 요리 현장에서 수업하고 있는 강사의 수업을 도와주며 요리수업실습을 하는 것이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준비물과 요리 재료들을 챙기고 오늘 수업에 대해 숙지를 한다. 수업에는 어떤 부분을 도와야 하는지 전달받고 나면 수강생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고 수업이 진행이 된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이라 그런지 3시간 넘게 꼬박 서있는 일이었지만 즐겁기만 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지내던 어느 날 몇 달간의 어시스트를 마치고 이제 하산해도 되겠다며 내게 수업을 제안했다. 시간이 겹쳐서 할 수 없는 수업이라 넘겨주고 싶은데 해보지 않겠느냐고, 엄마랑 아이랑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지만 첫 수업으로는 준비해야 할 인원이 많아 부담이 됐다.  40 가정인데 요리는 80명분을 준비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지만 이렇게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해 보겠다고 말했지만 과연 해낼 수 있을지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요리명은 참외를 이용해 컵 샐러드를 만드는 것이다. 샐러드 만들 과일들을 준비하여 어린이들이 앉아 있는 상상을 하며 "어린이 여러분"이라고 할까 "얘들아"라고 할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수업도 시연해 보았다.     


처음이라 긴장하기도 했지만 많은 양의 요리 재료를 손질하느라 수업 전날 밤을 꼬박 새웠다. 머리는 지끈거리며 아파오고 눈은 어질어질,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이럴 때 어떤 분들은 청심환을 먹고 수업을 하기도 한다. 나도 청심환을 먹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역효과가 나타날까 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요리 도구와 포장재를 담은 박스만 3개, 과일과 샐러드 소스를 담은 아이스박스만 3개, 소소한 짐도 하나, 가방까지 짐이 어마하게 많았다. 혼자는 옮길 수가 없어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밤을 꼬박 새운 탓도 있지만 그간의 긴장이 몰려오며 어떻게 수업을 했는지 모른다. 잠을 못 잔 탓에 비몽사몽이었지만 같은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며 열심히 설명했고,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열심이었다. 이제 마지막 고사리 손으로 꼭 꼭 눌러가며 만든 참외 샐러드를 도시락에 담기만 하면 된다는 안도감에 휴~하는 짧은 숨을 내쉬고 있는데  몇몇 아이들이 다급히 “선생님 뚜껑이 안 닫쳐요"하고 나를 애타게 부른다. 뚜껑이 안 닫친다니, 분명 잘 됐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듯했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눈은 다급히 교실을 둘러보는데 기관에 비치된 투명테이프로 임시 고정을 하고서야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다. 준비 때는 꼼꼼히 체크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처음 하는 수업이었던지라 적잖이 당황해서 화가 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짐을 어떻게 챙겨서 나왔는지 모른다. 왠지 모르게 부끄럽고 속상하기만 했다. 의뢰인이 뭐라 한 것도 아닌데 포장재에 대한 불편함도 그렇고 밤샘으로 인해 컨디션도 좋지 않은 상태로 수업을 하는 나 자신이 더 속상했다. 80명분의 요리 도구들은 박스를 열지도 못한 채 싱크대 한쪽 옆에 옮겨다 놓았다. 식사도 아침부터 걸렀기에 한 술이라도 뜨라는 남편 말에 겨우 밥을 먹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입은 꺼끌 거려서 무슨 맛인지 느끼지도 못했다. 이러려고 내가 이 일을 시작했나 후회도 밀려오고 잘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아서 펑펑 울다가 그대로 침대에 기절한 듯 뻗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잠이 깨서 일어나 보니 새벽 3시였다. 한 숨 자고 나니 조금은 정신이 드는듯하여 주방으로 가보니 어제의 요리수업 짐들이 열지도 않은 채 덩그러니 놓여있다. 수업 도구들을 하나씩 꺼내 설거지를 하고 나니 새벽 5시. 커피를 타놓고 식탁 앞에 앉으니 지난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괴롭기만 했다. 자책감도 밀려왔다.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훌쩍이고 있는데 남편이 깨어났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고, 실수도 할 수 있는 거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처음 맡은 수업치 고는 인원이 너무 많았다고 다독여준다.  남편의 말에 위로를 삼으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몸이 얻어맞은 듯 욱신거리고 아팠다.




교실 한쪽 오븐에서는 구수한 버터 냄새가 피어오르고,

요리 도구들을 정리하며 아이들이 재잘재잘 내게 묻는다.

"선생님 수업 언제 끝나요?"

"응, 빵이 다 구워지려면 30분 기다려야 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니?"

"아니요, 1시간 더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우리 여기서 밤새워 요리하면 안 돼요?"

"6시면 문을 닫는데 밤새울 수는 없지. 밤새웠으면 좋겠니?"

"네" 마치 아이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대답한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이 시간을 기다리는 아이들 덕분에 나는 산더미 같은 짐들을 싣고 또 요리하러 간다. 


그래, 나는 요리하는 작가다!


매거진의 이전글 레몬 말고 유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