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하게 된 이유...
어릴 적 '요리사'라는 직업을 꿈꾼 적이 있다. 내가 차린 밥상은 엄마의 투박함과 달랐고, 냉장고에 뭐라도 있으면 어렵지 않게 상을 차렸다. 한 번은 아버지가 동네에서 지인들과 술을 몇 잔 드시고 귀가하셨다. 엄마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일하시느라 감감무소식이고 아버지는 저녁상을 차리라고 내게 말했다. 찬장을 열어봐도 마땅히 먹을 것도 없고, 나는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는 반찬을 가지런히 담아냈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이 차린 밥상을 보시고는 세상 처음 먹는 밥 인양 맛있게 드시는 게 아닌가.
해가 다 지고 어둠이 내리던 시각,
엄마는 밭일을 두고 올 수 없어 늦게까지 풀을 뽑다가 들어오셨다. 쪼그리고 앉아 김매는 것이 버거웠던지 다소 지쳐 있는 엄마에게 아버지는 다짜고짜 크게 소리친다.
"아니, 뭐하다가 이제 들어와? 식구들 배고픈 것도 모르고"
"풀이 하도 많아서 풀 뽑느라 늦었지"엄마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답을 하신다.
"저녁은 야가 차려줘서 먹었어. 엄마보다 훨씬 잘하네. 당신도 애한테 좀 배워"
"잘 잡쉈다니 다행이네" 그 한마디 던지고 엄마는 씻으러 간다며 어기적 거리며 욕실로 향하셨다.
아버지의 칭찬 때문이었을까? 나는 요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영양학과에 지원했으나 보기 좋게 떨어졌다. 취업 잘된다는 말에 당시 꽤나 경쟁이 높았고,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후 디자인, 출판사, 유아교육, 유치원 교사, 전업주부의 길을 걸었고 경단녀를 거쳐 다시금 시작한 사회생활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요리일을 하게 되었다.
일을 하며 두 아이를 독박으로 키워야 했기에 하루 종일 회사에 메여 있는 일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선택한 요리강사의 길은 생각보다 재밌고, 뿌듯했다.
문제는 기관에 따라 요리 도구와 재료를 출강 때마다 산처럼 이고, 지고 다녀야 했다. 짐을 나르는 것은 요리 일 중 꼭! 필요한 부분이라 뿌리칠 수 없다. 고민이 깊어졌다. 몸 여기저기 쑤시는 것 같았다. 아니 삭신이 쑤셨다. 남편은 나를 끌고 헬스장에 갔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아파서 몸이 다 망가진다고 말이다.
산처럼 쌓인 요리 짐들을 언제까지 들고 다녀야 할까?
어느 순간 요리 출장 강의에 회의가 들었다. 이제 직업을 전향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100세 시대에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데 60~70대까지 짐들을 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요리와 글쓰기 수업을 병행하며 작가의 길에 도전했고, 브런치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제 드디어 나도 요리 짐 들고 다니지 않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써야지' 다짐하며 남편의 꿈 이야기, 자녀 이야기를 열심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식문화 공모전 글을 쓰며 내가 정말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았다. 그토록 힘들다고 외쳤던 요리 일을 생각하며 글 쓰는 내내 심리적 치유가 일어났고, 어린 시절 요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리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집안 살림에 농사일까지 해야 했던 엄마를 생각하니 그녀의 고충을 먹고 내가 이만큼 자란 것이다. 결국 나는 요리를 떼어놓고 내 삶을 논할 수 없게 되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의 결정판은 내 딸의 한마디가 그 힘을 더 힘껏 불어넣어 주었다.
"엄마는 요리 이야기를 쓸 때 가장 빛나!"
딸아이에 이 한마디는 내 마음을 감동시켰고, 내 몸이 허락하는 한 요리 일은 계속하기로 했다. '요리 일을 하지 않고 어찌 요리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그 요리 이야기를 이 공간 'go 작가의 요리' https://brunch.co.kr/magazine/gogo 매거진에 이어가려고 한다. 그동안 가족들과 혹은 수업하며 맛있게 먹었던 요리도 함께 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