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없는 해외 가족여행
직장에 매여 있다 보니 삶의 기쁨이 없다. 남들은 해외여행도 잘 가고 외식도 자주 하는데, 맨손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해 허리띠 졸라맨 것이 어언 15년이다. 결혼 전 저축한 비용이 부모님 집 마련에 고스란히 들어간 상황이라 신부가 준비하는 혼수비용을 줄여 월세 보증금을 마련했다. 15년 전 일이라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겠으나, 전세든 월세든 집을 마련해야 하는 신랑에겐 암담하고 힘들었던 일이었다. 어느 신부가 고급 혼수와 다이아반지를 싫다고 하겠는가?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혼수 욕심 내지 않고 아끼고 아껴서 보증금에 보태준 아내에게 고마워했다. 고마운 마음은 아직까지도 뼛속까지 남아있다고 말이다. 혹여 라도 마음 상할까 친정가족들에게 조차 그 사정을 모르게 비밀에 부쳤으니 죄송한 마음이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족들과 여유로운 삶은 고사하고 허리띠 졸라매야 한다고 강조하던 K는 한없이 미안해했다. 경제적인 여유를 줄 수 없다면 가족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도 여유 있으면 좋으련만, 기나긴 야근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내 은주는 자녀들의 경제교육을 제법 잘 가르쳤다고 자부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프리마켓을 다니며 안 쓰는 물건을 팔아 용돈을 벌기도 하고, 용돈을 세 개의 통장으로 나누어 각자 관리하고 있다.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쓰기 통장에 모아둔 돈으로 구입하기도 한다. 물론 여느 아이들처럼 부모에게 온갖 응석을 부리며 사달라고 했던 적도 있지만 말이다.
2018년 1월 두 아이가 모은 돈으로 비행기 삯이며 숙박비용을 각자 계산하여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도록 비행기 타 보는 게 소원이라던 아이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함께하지 못했다. 회사 업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소소한 일들을 경험한 아이들은 미국에서 생활을 하게 된 친구를 만나러 가겠다며 부모를 졸랐다. 미국이라면 1인당 왕복 비행기 삯이 100만 원은 할 텐데 그 응석을 어떻게 받아 주겠는가. 반신반의하며 각자 비행기 삯을 모으면 미국으로의 여행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3년 계획을 세웠지만 부부는 자녀들이 금방 포기할 줄 알았다. 말이 100만 원이지 어디 쉬운 일인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지급된 용돈은 고스란히 통장으로 들어갔다. 포기하려는 위기도 있었지만 결국 3년이 되어갈 무렵 아이들은 100만 원의 근사치를 채워갔다. 비행기를 미리 알아보니 10만 원은 저렴하게 LA-뉴욕을 경유하여 다녀올 수 있다. 아내 은주는 남편 K에게 졸랐다.
“준호 씨, 아이들이 참 대견하네요. 친구 만나러 간다는 목표지만 미국 LA는 비행기 삯이 좀 저렴하니 당신도 3~4일 같이 갑시다. 결혼 기념 여행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15주년 결혼 기념이라고 생각하면 좋잖아요.”
K도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직장이 적자라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에 차마 자리를 비우고 연차를 쓰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신이나 잘 다녀오구려. 난 도저히 연차를 낼 수가 없다니까”
정말 미칠 노릇이다. 4일을 연차 내라는 것도 아니고 주말 끼고 2일만 연차를 내라는데 당신이 없으면 회사가 망하냐고 울화가 치민다. 지금껏 여행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아이들 핑계로 물장구치고 가재 잡는다고 같이 가면 좋으련만 남편 K를 설득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았다. 회사에 찾아가서 우리 남편 2일만 연차 내달라고 빌어볼까? 오만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1년 365일 퇴직 때까지 열일 할 텐데 그깟 2일이 뭐 대수라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여행 출발 3일 전까지도 남편 K를 설득해 보았으나 안 된다고 말하는 남편도 죽을 지경이겠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얘기도 꺼낼 수 없었다.
아이들의 미국 방문 꿈이 실현되는 그 순간도 K는 회사를 지켜야만 했다. 아이들도 아빠가 회사일로 인해 함께 가지 못함을 이해한다고는 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휴먼 스피치 대표 김창옥은 ‘ 행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고 했다. 우유가 유통기한이 끝나면 상하든 발효되어 치즈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데 자녀들과의 의미 있는 첫 해외여행은 그렇게 유통기한이 지나고 말았다. 소중한 추억의 시간은 남편에게 먹을 수 없는 상한 우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단계 즉, 고소한 우유를 받았을 때는 어떻게 먹을까 무척 행복했을 텐데 말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심심찮게 언론에서 보도되기도 하지만 직장이라는 조직은 아직도 암울한 20세기에 머물고 있다. 직장에 매여 있는 한, 가족과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지금의 생활을 다음 세대까지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
직장이라는 곳은 일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고, 일에 대한 성과는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수치로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목을 매는 조직에서 벗어나 일의 의미와 즐거움이 있는 곳, 직장 동료들 간의 협력이 가능한 곳,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따뜻한 조직문화가 어서 정착되길 K는 간절하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생명권, 자유권, 행복의 추구권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토머스 제퍼슨_ 미국 독립선언서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