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눈물
< 어머니와 한복 >
고등학생 때 남편이 쓴 시
새벽과 함께 눈을 뜨면
언제처럼 저 문틈 사이로 보이는 불빛
드르륵드르륵 사악
어머니의 재봉틀과 가위질 소리는
나의 귀에 자장가로만 들려오고
언제나 우리들을 위해
지친 몸을 달래 가며
몇 푼 안 되는 품삯으로 밤새워 일하시고
식구들이 잠에 들어도
이 밤을 지키시는 어머니
언제처럼 저 문틈 사이로 스미는 불 빛
내 사랑 어머니를 생각하는 동안
또다시 눈이 무거워지고
이 밤은 더욱더 깊어만 간다.
힘든 일이 한꺼번에 태풍처럼 닥쳐왔다. 인생의 쓴맛은 한꺼번에 다가오기 마련인가 보다. 외삼촌의 사업실패로 외숙모의 한탄을 들어주는 것도 어머니의 몫이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진리인양 삼 형제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당부했다.
“너희들은 사업 절대 하지 말거라”
“별난 것 할 생각 말고 다박다박 월급 나오는 월급쟁이가 제일이지”
“기술이 최고여, 기술 있으면 아무도 무시 못 한다. 착실하게 기술이나 배워라”
90년대 산업화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던 시대라 경제에 눈이 어두웠던 어머니는 ‘기술’과 ‘월급쟁이’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일찌감치 기술을 익히기 위해 진로를 전자과로 정했다. 그에게 맞는 진로가 무엇인지,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시장상인들은 유난히 노래를 잘 부르는 꼬마 K에게 사탕이며 동전을 쥐어주며 한곡 더 불러보라고 주문을 했고 어린 꼬마는 트로트도 구성지게 불러 박수를 많이 받았다. 사진관 사장님은 노래 잘 부르는 꼬마 K가 기특하기도 하고 예쁘다며 사진 찍어 쇼윈도에 걸어 놓고 볼 정도였고, 살기 팍팍했던 시장상인들의 세상살이 시름을 잊게 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까지였다.
자라면서 노래를 잘 부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노래는 바쁜 어머니 대신 외로움을 잊게 해 주었고, 캄캄한 미래를 헤쳐 나가는 희망을 주기도 했다. 때론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내비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연예인은 가난한 베짱이로 보일 뿐이다.
어머니는 하루 한 끼 먹는 것조차도 사면초가다. 하루를 넘기는 일이 삶의 가장 큰 숙제가 되었다. 세상을 원망해 보았자 자식들 밥 한 끼 해결되지 않는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옷을 만들었다. 한복, 수의, 보자기 할 것 없이 천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명절에는 끼니를 거르면서, 잠도 미뤄가며 재봉질을 하셨다.
어느 날 새벽,
화장실을 가기 위해 눈을 뜬 중학생 아들 K는 숨이 멎고 말았다. 어려운 상황에도 씩씩하시던 어머니가 재봉틀 앞에서 소리 죽여 가며 울고 계셨다. 들썩이는 어깨를 보고 있자니 한없이 죄송한 마음이다. 밤새 재봉틀을 붙잡고 있으나 납품은 밀려있고 눈물만 났을 거다. 숨죽여 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중학생 K는 다짐했다.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말자’
'어머니의 눈에 눈물 나는 일 없게 순응하며 살자’
‘얼른 취직해서 어머니께 월급을 안겨 드려야겠다’라고 말이다.
어머니의 피나는 노력으로 어렵게 삼 형제 학교도 마치고, 각자의 직장을 가지며 조금씩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랫동안 재봉틀에 앉아 있었던 후유증으로 고관절 수술을 하게 되었고, 이젠 재봉틀 앞에 장시간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되셨다. 그렇게 20년 동안 버팀목이 되어준 재봉틀은 가끔 바짓단 줄여달라고 마실 오시는 이웃 분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남편 K의 중얼거림과도 같은 지난 과거 이야기는 숨이 탁! 멎는 듯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남편 K의 삶을 꼬마 K로 다시금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댕댕 거리며 울려 댔다. 아내 은주는 눈먼 사자처럼 꼬마 K의 한을 읊조렸다.
"바보야, 왜 당신 하고 싶은 것을 한 번도 고집하지 않았어? 그래서 행복했어? 당신 삶에 만족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