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이 한 켤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두 켤레였다. 운동화 옆에 나란히 놓여 있던 슬리퍼가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아직 다른 것으로 채우지 못했다. 현관에 택배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쿠팡에서 시킨 건데 뭘 시켰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새벽 3시에, 잠이 안 와서, 아무거나 누른 거다.
불을 켠다. 조명이 원래 이렇게 밝았나. 둘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혼자 되니까 형광등이 유난히 하얗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다가 문에 붙어 있는 제주도 마그넷이 눈에 들어온다. 작년 여름에 같이 사서 붙인 거다. 떼야 하나. 손이 안 간다.
이렇게 시작된다. 이별 후의 일상이라는 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건 집의 소리다.
현관문을 닫으면 정적이 기다리고 있다. 예전에는 몰랐다. 누군가 있으면 집에는 소리가 있다. 부엌에서 물 따르는 소리, 다른 방에서 유튜브 보는 소리, 드라이기 돌아가는 소리. 그런 것들이 전부 사라지면 남는 건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뿐이다. 그게 유난히 크다. TV를 켜본다. 아무 채널이나. 사람 목소리가 필요해서. 그런데 꺼야 할 때가 온다. 리모컨을 누르면 다시 냉장고 소리만 남는다.
한 내담자는 이별 후 잠들 때까지 라디오를 틀어놓았다고 했다. 내용은 안 들렸다. 그냥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방 안에 있어야 잠이 왔다고. 어느 날 새벽에 DJ가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내일 봐요"라고 했을 때, 이불 속에서 울었다고. 자기한테 하는 말이 아닌 걸 알면서도, 누군가 "내일 봐요"라고 해주는 게 그날 밤 유일한 위로였다고.
3년 동안 매일 아침 "잘 잤어?"로 시작하고, 저녁마다 "뭐 먹었어?"로 끝나던 하루가 있었다. 천 일이 넘는 루틴이 하루아침에 증발한다. 눈을 뜨면 카톡을 확인하던 손가락이 허공을 더듬는다. 알람을 끄고 화면을 보는데, 새 메시지가 없다. 당연하다. 그런데 그 '당연하다'를 몸이 아직 모른다.
한 달이 지나면 꼭 듣는 말이 있다. "언제까지 그렇게 우울해할 거야?"
슬픔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투다. 친구들은 선의로 소개팅을 주선한다. "새로운 사람 만나면 잊혀져." 이전 사람 위에 새 사람을 덮으면 밑에 깔린 기억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모님은 "밥은 먹고 다니니?"라고 묻는다. 밥맛이 없어서가 아니다. 혼자 밥 먹는 그 행위 자체가 '혼자'를 너무 적나라하게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피하는 거다. 직장 동료는 "일에 집중하면 잊혀져"라고 한다. 그래서 야근을 한다. 새벽 1시까지 엑셀을 정리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30분째 같은 셀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별은 죽음과 닮았다.
함께 만들어온 '우리'라는 세계가 무너지는 거다. 둘만 알아듣던 농담, 눈빛으로 통하던 대화, "나중에 여기 가보자"고 했던 장소들. 그게 한순간에 쓸모를 잃는다. 그런데 장례식은 없다. 부고도 없고 조문객도 없다. 남들 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상담실에서 한 내담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일 힘든 건 제 슬픔이 정당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주변에서 "별일 아니야"라는 말만 들으니까. 그런데 별일이다. 2개월이든 3년이든, 당신이 쏟은 시간과 마음이 통째로 사라졌는데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
"시간이 약이야."
이만큼 무책임한 위로가 있나. 시간은 약이 아니다. 시간은 그냥 시간이다. 상처가 아무는 건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당신이 뭔가를 했기 때문이다. 울었다. 화냈다. 친구랑 막걸리를 마셨다. 새벽에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다. 번호를 지웠다가 다시 저장했다. 그런 것들이 당신을 조금씩 다른 자리로 옮겨놓는다.
시간에만 기대는 건 부러진 뼈에 깁스도 안 하고 저절로 붙기를 바라는 거다.
인스타그램을 연다. 전 연인의 스토리가 올라와 있다. 새로운 카페, 웃는 얼굴, #일상 #행복.
손가락이 멈춘다. 차단할까, 더 볼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아무는 딱지를 자꾸 뜯으면 흉터가 남는다. 알면서도 손이 간다. 프로필을 눌러 사진을 하나하나 넘기고, 댓글에 모르는 이름이 보이면 그게 누군지 추리하기 시작한다. 다 보고 나면 자기혐오만 남는다.
"지금 뭐해?" 새벽 2시, 헤어진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
술 취해서 보낸 게 분명하다. 심장이 뛴다. 머리는 "답하지 마" 하는데 손은 이미 화면 위에 있다. 이럴 때 5분만 참아보는 게 낫다. 화장실을 갔다 와도 좋고, 물 한 잔을 마셔도 좋다. 그리고 이것만 생각해보는 거다. 내일 아침에 이 대화를 다시 봤을 때, 나는 어떤 기분일까.
대부분 후회한다. 그런데도 답장을 보냈다면, 괜찮다. 완벽할 필요 없다. 다만 새벽의 감정과 아침의 이성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 그건 알아두는 게 좋다.
이별은 마음만 아픈 게 아니다. 몸이 진짜 아프다.
뇌 영상을 찍어보면 이별의 고통과 신체적 고통이 같은 영역에서 반응한다. '마음이 아프다'는 건 비유가 아니다. 소화가 안 되고, 두통이 오고, 잠이 안 온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감기를 달고 산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건 몸을 움직이는 거다. 거창할 필요 없다. 동네 한 바퀴. 이어폰 끼고 아무 노래나 틀고 걷는다. 발이 움직이면 머릿속도 조금씩 환기된다.
이별 후 우울이 찾아올 확률은 평소의 20배라고 한다.
처음에는 좀 피곤한가 보다, 하고 넘긴다. 그러다 일상이 점점 좁아진다. 샤워가 귀찮다. 사람 만나기가 부담스럽다. 좋아하던 드라마도 재미가 없다. 가장 위험한 건 무감각이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상태.
그 지점까지 갔다면 전문가를 만나는 게 낫다.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센터.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상담실에서 내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좀 더 일찍 올 걸"이다.
"소개팅 한번 해볼래?"
주변은 선의다. 그런데 이 말 앞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함정에 빠진다. 하나는 외로움을 메우려고 준비 안 된 채 나가는 거다. 데이트 내내 전 연인과 비교하게 되고, 집에 오면 더 텅 빈다. 다른 하나는 반대쪽 함정이다. "내 마음이 완벽하게 정리된 다음에야 새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다"는 강박. 이쪽에 빠지면 영원히 준비가 안 된다. 마음이 100% 정리되는 날은 오지 않으니까.
새로운 만남이 상처 위에 상처를 내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새로운 만남이 치유가 되는 경우도 있다. 갈리는 건 타이밍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빈자리를 급하게 채우려는 만남은 아프다. 그런데 아직 다 낫지 않았어도, 누군가를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그건 다른 거다. 그때는 나가도 괜찮다. 상대에게 솔직하면 된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서, 천천히 알아가고 싶어요"라고.
좀 지나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혼자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혼자 보는 영화. 혼자 떠나는 여행. 침대를 대각선으로 차지하고 자는 밤. 사소하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것들이 쌓이면 그게 새 일상이 된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알게 된다.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았던 시간을, 버텼다는 것.
다시 현관으로 돌아가보자.
신발은 여전히 한 켤레다. 택배 상자는 뜯었다. 별것 아닌 물건이었다. 냉장고의 제주도 마그넷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떼지 않았다. 떼지 않아도 된다. 그건 그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온 시간의 일부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천장이 어둡다. 내일 아침에 "잘 잤어?"는 오지 않는다. 그걸 안다. 그래도 괜찮은 날이 온다는 것도, 이제는 조금 안다.
라디오를 켠다. 아무 채널이나. DJ의 목소리가 어두운 방을 채운다. 내용은 안 들린다. 그런데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방 안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조금 덜 조용하다.
당신의 슬픔은 정당하다. 누가 뭐라 해도.
By. 나만 아는 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