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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 Jun 03. 2023

'야생성' 따위 없어도 현장에서 일하는 이유

해 질 녘에는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보며 걷는다.


걷기 운동이라도 하고 싶은데 운동할만한 곳이 없어서 집에서 홈트를 몇 번 하다가 숙소 옥상이 꽤 널찍했던 것이 생각나서 올라갔다. 동네를 슬슬 산책하듯이 걸으면 좋겠지만, 개들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걷기엔 ‘야생성’이 많이 약해졌다.


아니, 그 야생성이라는 거 나한테는 애초에 없었다. 최근 지난 십여 년을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너무 가혹한 환경에서 살게 했다는 생각을 했다. 에어컨 없는 로컬 식당에서 먹는 현지음식이 더 맛있다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로컬 버스에 낭만이 있다고, 흙탕물 속을 철벅철벅 걸어 다니면서 불편함에 익숙해지면 자유로워진다고, 벌레가 나오는 건 당연한 거라고, 문명의 이기보다 현장 속의 자유로움이 옳다고 믿었다.


사실 여전히 나는 더운 것도 너무 싫고, 길가에 개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신발에 진흙이 묻는 것도, 벌레나 도매뱀이 돌아다니는 것도, 불편하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는 것도 정말 싫다. 그런 것들에 의연해지려고 노력했던 나의 가상한 시간들에 박수를 보낸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의연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제야 내가 그런 것들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활하는데 에너지를 다 뺏기면 일도 꿈도 엉망이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지금은 그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 중이다.


상쾌하게 일어나 우중충하고 냄새나는 사무실에 출근을 한다. 리노베이션을 하기로 했지만, 아직은 퀴퀴하다. 출근과 함께 한층 다운된 기분으로 하루종일 이메일을 확인하고 답장을 하고 전화를 하고 화상회의를 하면서 분노와 짜증과 급격한 배고픔을 느끼며 퇴근을 한다.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뉴욕카페재즈플리 같은 걸 켜놓고 세븐일레븐에서 사 온 빵을 구워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허기를 채운다. 잠시 밖으로 나와 한쪽에 지는 노을과 한쪽에 둥실 떠오른 달과 그 사이에 총총 빛을 내기 시작하는 별들을 구경하며 옥상을 서성이고 나서,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면 좀 살 것 같다.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리며 환기를 하는 시간은 중요하다. 현장에 파견된 사람이라면 현지인들과 같은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에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사 먹는 아이스카페라테 한 잔에도 죄책감이 들었었다. 그 사이의 밸런스를 찾는 시작은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 적어도 물러설 수 없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 있다. 그 어떤 것도 정답은 아니지만, 오답은 많이 있다. 내 활동이 오답이 되지 않으려면 그래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이번 파견의 숙제인 것 같다.


오늘 우리를 방문한 Director는 우리가 일하는 곳이 ’ 아름답다 ‘고 말하다가 ’ 오! 현장에서는 아름답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지!‘하며 입을 가렸다. 이곳은 아름답다. 그런데 그의 말처럼 누군가 잠깐 둘러보고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힘차게 눈을 흘겨줄 것만 같다. 솔직히 아직 편하고 즐겁지는 않다. 조금 괜찮은 것이 몇 가지 있다면, 불편한 것은 수십 가지다.


그래도 이 캄보디아의 작은 도시 시소폰에서 적당히, 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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