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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Jul 30. 2023

공항의 서점에서 길을 잇다

공항에 있는 서점에 갔다.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온 동안 서점에 꼭 가고 싶었는데 집 가까이에 서점이 없기도 하고, 일부러 서점을 찾아가기엔 개인시간이 너무 없었다. 어쨌든, 공항에서라도 서점을 만나니 반가웠다. 


서점의 한 벽면은 아이돌 굿즈가 채우고 있었고, 다른 쪽에는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 - 이어폰, 목베개 같은 - 이 진열되어 있었다. 도서 진열대의 한쪽에는 부와 성공을 이야기하는 자기 계발서와 경제서적이, 한쪽에는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에세이와 인문서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공항이라는 공간에서는 책이 갖는 의미가 사뭇 달라 보인다. '공항소설'이라는 장르 아닌 장르가 있다. 공항과 비행기에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흥미롭고 가벼운 소설을 의미한다. 어깨에 짐을 메고, 여권과 항공권을 손에 들고 수시로 확인하며, 시간에 맞추어 탑승게이트로 분주하게 이동하는 동안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사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평소에도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일 것 같다. 그럼에도 떠남이 예정되어 있는 여행자의 손에 들린 책이라면, 조금은 가벼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캄보디아에 있는 동안은 당분간 책을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소설책 한 권과 에세이 한 권을 사기로 했다. 요즘은 동네의 작은 상점에서 일어나는 훈훈한 이야기들이 대유행이다. 감성적인 일러스트와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제목의 소설들이 전면에 비치되어 있었다. '공항소설'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뒤편에 기욤뮈소라든지 히가시노게이노 같은 외국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소설, 그리고 김연수나 정지아 작가 등 최근의 한국 문학소설들도 몇 권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평소 읽어보고 싶었던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골랐다.


이번에는 에세이 한 권을 고를 차례다. 소설책이 있는 반대편 진열대에는 인생의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는 류의 에세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생각들을 맛깔나게 풀어놓은 에세이를 좋아한다. 교훈은 없어도 친한 사람과의 즐거운 한판 수다 같은 책. 적당히 유머러스하지만 저급하지 않고, 유명인의 인용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책. 스토리가 아닌 생각의 줄기를 따라가는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가 그랬다. 나는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최근에는 권남희 번역가가 쓴 에세이도 재미있게 읽었었다(최근이라기엔 이미 반년 전이긴 하지만).


벽면의 서가로 자리를 옮기니 고전문학과 스테디셀러 작가들의 책이 꽂혀 있었다. 역시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이 서가의 한 부분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책을 하나씩 꺼내 넘겨보면서 이 중에 하나를 고를까 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하루키를 읽지 않은지가 한참 된 것 같다. 순간 '잘난 남자의 한가로운 글은 읽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이 올라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작가를 향한 그 뜬금없는 반발심이 당혹스러웠다. 그의 책을 덮고, 김훈의 책들과 고전문학들을 더 둘러보다가 결국 소설책 한 권만 계산하고 나왔다.


다섯 시간 남짓 비행하며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다 읽었고, 경유지에서 두 시간 넘게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며 집에서 챙겨 온 책을 한 권 더 읽었다. 씨엠립으로 오는 비행기에 앉아서 두 권의 책이 주는 여운을 조금 느끼다가, 문득 서점에서 느낀 반발심에 대해 생각했다. 그 뒤에 숨은 진짜 정체는 뭘까. '잘난' '남자' 그리고 '한가로운 글'이라는 표현 속에 내 열등감이 환하게 드러났다.


매일 소설을 쓰던 어린 날들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글을 읽으며 감상을 말하고 격려해 주던 시절에 누군가 나의 글을 보고 '하루키를 흉내 낸 것 같아.'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은 내 첫 번째 장애가 되었다.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내 글이 무언가를 흉내 낸 느낌이 들 수 있다는 것이 글을 쓸 때마다 스스로를 움츠러들게 했다. 두 번째는 '왜 사랑이야기만 써요?' 하는 물음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나는 사랑하는 감정과 헤어짐에 대해 주로 생각했었다. 연애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였고,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우물쭈물 대다가 다음엔 다른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급작스럽게 환경이 변했고, 여러 가지 고민들로 머릿속이 바빠졌다. 그렇게 시간은 훌쩍 지나버렸다. 글을 쓰지 못한 건 환경과 처지 탓으로 돌아갔다.


부럽다.


이것이 내 솔직한 감정임을 알았다. 새벽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시간 맞춰 글을 쓰는 부지런한 작가의 일상은 언제나 피곤하고 불안한 하루하루가 쌓여가는 나에겐 한가함으로 곡해되었다. 그의 글이 더 이상 재미있게 읽히지 않았다. 재미있을수록 재미가 없어졌다. 그의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청년기는 지나가버렸고, 나는 아직도 글쓰기에 있어서는 제자리걸음이다. 그가 쓴 문장들은 마음 어딘가를 콕콕 찌르는 질책처럼 느껴졌다. 그의 한결같은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하루키를 흉내 낸' 글을 쓰던 시기를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부럽다는 감정은 부끄러움으로 연결되었고, 부끄러움은 반발심이 되었다.


비행시간과 경유시간을 모두 합치면 9시간 정도 된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짐을 풀기도 전에 노트를 펼쳤다. 끊어진 시간을 다시 이어 붙이기로 한다. 내가 글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쓸 수 없는 글을 쓰려고 했던 순간부터였음을 알았다. 그 시간을 잇기 위해서는 여전히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


참,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공항소설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비행하는 내내 주변을 살피며 눈물과 콧물을 훌쩍여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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