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avorite Things
자몽향이 나는 비누 하나를 샀다. 바스락거리는 포장을 벗기고 매끈한 비누알을 세면대 옆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자몽 알갱이를 닮은 붉은빛 덕에 세면 대 주변의 공기가 달콤해진다. 물을 틀어 손을 적시고 동글동글 어루만지니 하얀색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온다. 순식간에 자몽 알갱이들이 터져 나오는 듯 상쾌한 공기가 퍼진다. 손을 씻는 행위가 비누 하나로 특별해진 기분이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소파 위에 드러눕기 전에 자몽향 비누로 손을 씻는다. 손 끝에서부터 특유의 새콤함과 시원함이 코를 통해 온몸으로 잔잔하게 퍼진다. 한창 혹서기를 지나고 있는 캄보디아의 뜨겁고 축축한 공기를 견디기 위한 작은 장치로, 자몽향 비누는 뜻밖의 수확이었다. 비누 하나로 위로가 된달까.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비누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릴 때는 다이어리 한쪽에 ‘좋아하는 것’ 목록을 적어놓고는 했었다. 일상의 주변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찾고, 그것에서 오는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어렵지 않던 시절이었다. '장미꽃 위의 빗방울과 아기고양이의 수염~'으로 시작되는 My Favorite Things의 가사처럼 아주 구체적이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들의 목록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쯤부터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성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다 쓸데없는 일이야"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어쩌면 자본주의 마케팅의 영향일 수도 있고, 실제로 좋아한다기보다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허영일 수도 있었다. 좋아한다는 느낌조차 어차피 영원하지 않은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을 잊고 무언가 더 큰 의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골몰했다.
며칠 전 심리상담을 받았다. 기관의 지원으로 억지로 받은 것이긴 하지만, 첫 번째 상담 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두서없이 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처음 시작한 이후부터 알게 모르게 받았던 상처들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동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상담 중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지금 하는 일이 사실은 내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고, 나름대로 스스로를 희생하며 해왔던 일이거든요. 그런데 충분히 지지받지도 못했고, 스스로 잘 해내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상담사에게 말한 희생은 아마도 '자몽향 비누'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예전 같았으면 이 비누를 사지 않았을 것이다. 비누의 기능만을 따진다면 비싼 가격이고, 대기업이 만든 비싼 비누보다 작은 숍에서 정성을 다해 만든 비누를 사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모든 것들에 일일이 가치판단을 하며 스스로를 가두며 살았으니 어쩌면 나에게 가장 상처를 준 것은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3년은 아이를 키우느라 일을 쉬기도 했지만, 힘들었던 기억들과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와 함께하며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치열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여전히 스스로에게, 또 다른 가족과 동료들에게 상처 주는 사람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아이를 그대로 사랑하듯, 나 자신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연습기간이었다. 덕분에 지금은 편안하게 캄보디아 생활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다시 '좋아하는 것' 목록을 적어본다. 자몽향 비누로 손 씻기, 마늘을 잔뜩 넣고 바질잎을 뿌린 오일파스타, 나무가 우거진 풍경이 보이는 카페에서 글쓰기, 뜨거운 바람에 바싹 마른빨래의 촉감, 샤워 후 소파에 편하게 앉아 일기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