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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Aug 20. 2023

우리들의 '해방', 아버지의 해방일지

그 거사 니 사정이제, 나가 머라고 했간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고 하니 후배가 물었다.


"드라마 원작인가요?"

"응?"


이 소설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무관하다. 유시민 작가의 추천으로 더욱 유명해져서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지인이 읽고 있길래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읽었다. 지인이 해준말은 그저 '재미있다' 한마디였다.



정지아 작가와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얼핏, '빨치산의 딸'로 등단했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실제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쓴 작품인 걸 보고 특정 이념이나 정치진영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가 싶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소설은 그렇지 않다.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는 굳이 말하자면 '인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소설 속에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서로 어울려 산다.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작가 정지아는 그런 소설을 쓰는 사람인 것 같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버지가 죽었고, 그 아버지를 조문하러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딸인 화자는 빨치산 출신이었던 아버지의 우스꽝스럽도록 진지한 사회주의적 사고와 평생에 걸친 유물론적 실천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빨치산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로서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소설이라는 것이 본래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그렇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할 뿐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빨치산'이라는 소재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한 무게로 다루고 있어서 소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것일 테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해방


'해방'이라는 단어가 요즘에는 잘 쓰이지도 않지만 굳이 사용한다고 해도 개인이 느끼는 정신적 강박과 스트레스를 벗어나는 '해방감' 정도로 쓰이지 않으려나. 그래서 내가 처음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을 보고 상상한 소설의 내용은 아버지가 스스로 씌운 굴레와 강박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또는 자기 불일치적 성향을 가진 아버지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든지.


실제로는 아버지로 인해 진정한 '해방'의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소설 속 아버지가 말하는 '해방'은 지금 세대(물론 나의 세대조차도)에게는 낯선 '민중해방'의 그 해방이지만,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해방'은 '삶으로서의 해방'이다.


소설 말미에 '죽음은 해방'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러나 죽음자체는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으로 만나게 된 삶의 궤적들 속에 아버지의 진정한 혁명, 해방이 드러난다. 아버지는 때로는 답답할 만큼 사람을 믿고, 사람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부장제도, 나이도, 성별도, 신분도, 좌익과 우익 사상까지도 뛰어넘어 그 안의 사람에게 진심 어린 관심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그게 아버지가 바란 혁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세상을 스스로 살아냄으로써 진정한 해방을 이루어낸다.


한때 급진주의적인 책들을 읽으며 '해방'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내가 어렴풋하게 이해한 '해방'이란, '진실하게 믿는 가치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설익은 가치, 내면화되지 않은 실천의 강요이다. 가치는 특정 이념의 이름도 아니고, 정치구호도 아니다.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것이다. 그렇기에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적'이었던 아버지지만, 아버지에게 '적'은 없었다.


또 하나, 해방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에게 씌워진 수많은 굴레와 이름들에 갇히지 않고 본래의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소설의 마지막에 아버지는 비로소 '빨치산'도 '아버지'도 아닌 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형 때문에, 작은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 때문에... 그의 신념은 소중한 가족들의 삶에 굴레를 씌우고 평생 원망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정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으로 우뚝 서서 삶을 살아간 사람, 소설은 그런 사람의 이야기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사실 소설의 사전정보를 미리 들었다면 부담스러워서 선뜻 읽으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감정이 힘들어지는 주제의 소설은 읽고 싶지 않다. 실제로 다섯 시간 남짓의 비행시간 동안 기내에서 책을 읽었는데 넘사시럽게 눈물 콧물 흘리며 읽었다. 그럼에도 우울하고 무거운 주제는 중간중간 구수한 사투리와 함께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 덕분에 한결 가볍게 읽힌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소설 속 화자는 아버지의 삶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코믹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 과한 진지함이 만들어내는 유머러스함이 결국 그래서 더욱 슬프고 먹먹해진다.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충격과 슬픔과 그것을 견뎌낸 시간들을 어떻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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