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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Nov 09. 2023

옥상 걷기

노을 지는 옥상, 별이 지는 옥상

옥상을 걷는다. 


멀리 노을이 진다. 때로는 붉게 타오르고 때로는 옅게 스민다. 사라지는 노을 쪽으로 고개를 빼고 바라본다. 옥상이라고는 하지만 단층 건물이라 멀리 보이지는 않는다. 키가 큰 팜트리들과 야트막한 산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다른 방향을 둘러보아도 이웃의 지붕들 사이사이 잎이 길거나 넓적한 열대 나무들이 무성하게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하늘을 바라보며 발끝을 들고 기지개를 켜본다. 하루종일 웅크리고 있던 몸의 근육들도 으라찻차 탄성을 내지르는 것 같다.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새떼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색이 짙고 날렵한 날개를 가진 몸집이 작은 새들이다. 가끔은 옥상에 내려앉았다가 나를 발견하면 후다닥 날아오른다. 


캄보디아의 거리는 걷기에 불편하다. 특이 이곳 지방도시의 골목길들은 어슬렁거리는 개들 때문에 함부로 걷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일단 한번 집에 들어오면 갇히는 신세가 된다. 숙소에 옥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꾸준히 옥상에 올라가 적어도 30분씩은 걷는다. 노을이 질 무렵에 걷으면 지금의 답답한 상황들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오면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저녁을 먹기 전에 옥상에 올라가야 노을을 볼 수 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허기져서 저녁을 먼저 먹게 되는 날이 대부분이라 해가 짧아지면서는 주로 가로등 불빛이 환히 비추고 있는 옥상을 걷는다. 구름이 없는 날에는 불빛을 손으로 가리고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본다. 별자리들의 각도가 미묘하게 다른 것을 보면서 지구의 다른 공간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공원에 모여서 운동을 한다. 공원 주변을 몇 바퀴씩 돌며 걷는 사람들 무리가 있고, 에어로빅 군단들은 거리의 소음을 담당하며 기운차게 몸을 흔든다. 곳곳에 가족단위로 산책을 하는 사람들, 보드나 인라인을 타는 청소년들, 꺄르륵 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뒤섞여서 저녁 무렵의 공원은 어디나 시끌벅적 에너지가 넘친다. 


우리의 옥상은 고요하다. 걷고 싶어서 나갔다가도 누군가 옥상을 차지하고 운동을 하고 있으면 조용히 자리를 비켜준다. 오늘도 내가 팔을 흔들며 걷고 있는 동안 다른 호에 살고 있는 누군가 슬그머니 올라왔다가 내려간다. 마주치는 이들을 보면 이어폰을 끼고 운동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이웃들이 내는 소음을 들으며 걷는다. 어딘가에서 매일 들려오는 쿵작거리는 캄보디아의 가요, 동네 아이들이 웃고 떠는소리, 달그락거리고 퉁퉁 탕탕하는 작은 소리들,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우는 풀벌레 소리 같은 것들. 음악을 들으며 걸어보기도 했지만, 주변의 소리를 듣는 것이 잡생각에 덜 빠지는 것 같아서 그냥 걷는다. 


한국의 걷기 좋은 거리들이 그립다.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는 산책로와 연결되어 있어서 사계절을 느끼며 걷기가 좋았다. 봄엔 벚꽃이 흩날리고, 여름엔 짙은 초록 사이로 개망초꽃이 무성하다가 낙엽이 뒹구는 마른 소리가 들리면 가을이었다. 겨울엔 청둥오리와 고니가 날아들었다. 


종로에서 일을 할 때엔 안국과 삼청동 일대, 경복궁과 서촌 일대를 자주 걸었다. 소품샵이나 옷가게를 기웃거리는 것도 좋았고, 오래된 서울의 골목길이 주는 운치도 좋았다. 


언젠가는 캄보디아의 노을이 지는 옥상, 별이 지는 옥상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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