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아이를 두고 해외파견 간 엄마 이야기
아이가 로그인한다. 화면 가득 아이의 얼굴이 보이고 곧 환한 웃음이 퍼진다.
“내 친구 공룡아, 안녕? “
“안녕! 오늘은 뭘 하고 놀까?”
나는 조금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로 인사한다. 아이는 ‘내 친구 공룡’을 아주 좋아한다. 먹고 있는 간식을 먹어보라며 내밀기도 하고, 가지고 있는 장난감을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한다. 재잘거리며 친구랑 놀이터에서 논 이야기나, 아빠랑 마트에 간 이야기도 해준다. 공룡친구는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하고, 입을 크게 벌리며 간식을 받아먹고, 고개를 흔들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아이가 공룡친구를 만나는 곳은 구글미트다. 얼굴이 공룡으로 변하는 기능을 써봤는데, 아이의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그 순간 나는 ‘내 친구 공룡’이 되었다. 나는 공룡친구가 되어 매일 저녁 아이를 만난다.
일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홈카메라를 켜면 거실을 왔다 갔다하고 또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아이가 보인다. 아이가 움직이고 있는 화면 속 익숙한 풍경 안에 내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이 때로는 믿기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간쯤이면 책을 읽어주거나 역할놀이를 하며 놀아줄 텐데, 아이에게 숫자 세는 법도 가르쳐주고 그림도 같이 그릴텐데, 하는 생각들을 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좀 더 같이 놀게 하고,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예쁜 옷을 입혀서 어린이집에도 보내고, 놀러 가서 사진도 예쁘게 찍어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잇곤 했다. 그러다 보면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마음을 괴롭혔고, 아이를 돌보고 있는 다른 식구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이의 끼니를 챙겨주고, 건강을 보살펴주고, 틈틈이 놀아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을 알면서도, 너무 동영상을 많이 보여주는 것 같아 보이고, 젤리와 초콜릿을 너무 자주 주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도 해서 종종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어린이집에서 올려주는 사진들 속에 아이가 아래위가 안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거나, 너무 작거나 큰 옷을 볼품없이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속상하기도 했다. 체력적으로 힘드실 할머니와 밤늦게 퇴근 후 시간적 여유가 없는 남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아이는 충분히 안정적인 환경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음이 느껴졌다.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을 가족에게 바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아이가 엄마와 연결되어 있고, 엄마가 아이를 언제나 생각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 여겼다. 엄마와 연결되는 짧은 시간이 아이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하도록 하고 싶었다.
아이는 공룡친구와 놀다가 "이제 엄마로 돌아와"하고 주문한다. 내 얼굴이 비치는 태블릿 PC를 여기저기 들고 다니면서 인형과 장난감들을 가지고 함께 역할놀이를 하기도 한다. 아이가 아이스크림가게를 열면 나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한다. 아이가 의사가 되면 나는 아픈 곳을 말하고 아이가 화면에 주사를 놔준다. 펄쩍펄쩍 뛰거나 앞 구르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 잘하지?”하며 뿌듯해하는 날도 있다. 또 때로는 화면을 켜놓은 채로 아이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나는 나대로 다른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같은 공간에 있지는 못하더라도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그렇게 아이와 나의 저녁시간이 하루하루 쌓여갔다.
어느 날, 아이는 열이 난다며 누워있었다. 유행하는 감기에 걸려 평소와 다르게 기운이 없었다.
“엄마, 왜 핸드폰 속에만 있어? 빨리 여기로 와, 내 옆으로. “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장 아이 옆에 같이 누워 토닥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아이와의 통화를 끝냈다. 망고나무와 잿푸룻 나무의 잎사귀 그림자가 드리워진 침실 창문 밖으로 시끌시끌 풀벌레가 울어대고 있었다. 혼자 앉아 있는 그 공간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