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5번, 전차 경기장의 녹색군과 청색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여러 번 읽기를 시도했지만, 처음 한두 장을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벌써 몇 번째 첫 번째 구절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용이 쉽지 않은 것도 이유겠으나, 오래전에 다운로드하여 놓았던 문예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의 번역본이 좀 불친절한 탓도 있다.
명상록 5번의 경우 이렇게 적혀 있다.
"경기장에서는 녹(綠)과 청(靑) 중 어느 편을 응원하지 말고, 검투사의 경기에서는 가벼운 둥근 방패 쪽이나 무거운 사각 방패 쪽 중에서 어느 편의 일원이 되어서도 안 되고,... "
경기장에서 열정적으로 어떤 편을 응원하는 것은 삶에 재미와 활기를 얻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응원조차 하지 말라니, 이 분 좀 빡빡하시네, 싶었다. 병기된 한자어가 푸를 녹과 푸를 청인 점도 눈에 띄었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영어 번역본을 찾아보았다. 물론 아우렐리우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썼다지만, 지금 나의 최선은 영어이니까. "From my governor, to be neither of the green nor of the blue party at the games in the Circus, nor a partizan either of the Parmularius or the Scutarius at the gladiators’ fights....(George Long 번역)"였다.
'경기장'은 'Circus'다. 지금은 서커스를 곡예단으로 이해하지만 원래 고대 로마에서 Circus(키르쿠스)는 라틴어로 전차경기장을 의미했다. 로마시대에 전차경기는 대중들이 사활을 걸고 열광했던 스포츠다. 애초에 유니폼색깔인 백(Whites), 적(Reds), 녹(Greens), 청(Blues) 4개 팀으로 구성되어 경기가 이루어졌었지만, 녹색과 청색팀이 가장 강력한 라이벌 구도였고, 아우렐리우스 이후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두 팀만 남게 되었다.
녹색팀과 청색팀을 응원하던 군중들의 충성도는 맹렬했다. 급기야 두 진영은 정치 파벌을 형성하는 정체성 집단으로 변모하여 공공정책을 통과시키거나 사병을 거느릴 만큼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녹색당은 서민과 상공업 종사자들의 지지를 주로 받았고, 기독교 단종론에 가까웠다. 반면 청색당은 대지주, 귀족 등 상류층의 후원을 주로 받는 전통기독교파였다. 이들은 폭력적이고 광적으로 서로를 적대시했다.
니카반란(532년)은 극단으로 치달은 녹색당과 청색당의 충돌이 잦아지자 이를 규제하려는 황제에 대항하여, 전차경기 중에 벌어진 폭동 사건이다. 군중들은 도시 곳곳에 불을 지르고 주요 건물들을 파괴하며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피신을 시도했지만, 황후 테오도라의 결단으로 결국 3만 명 이상이 학살당하면서 반란이 진압되었다.
당시 전차경기의 응원이 얼마나 치열하고 무모하고 광적이었는지를 알게 되니, '뭘 응원도 못하게 한담?' 하며 고루한 옛사람의 잔소리로 넘어갈 뻔한 문장이 엄중한 경고였음을 깨닫는다. 더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를 역사가 증명해주지 않았나! 게다가 목숨 걸고 싸워봐야 녹(綠)과 청(靑)은 같은 색이 아니더냐. 아우렐리우스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푸를 녹과 푸를 청 두 한자어가 무의미한 편 가르기에 휘말리지 말라는 진의를 뒷받침하는데도 꽤나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해석하다 보니, 또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이건 다 문예출판사 때문, 혹은 덕분이다. 그나저나, 관련 내용들을 찾아보면서 드라마틱한 인생의 테오도라 황후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 역사서 외에 그를 다룬 창작물은 극소수였다. 아쉬운 대로 '비잔틴 제국의 역사'라도 읽어봐야 하나 싶고, 기독교 단종론과 전통기독교, 명상록의 근간인 스토아 학파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슬며시 올라온다. 그러나 명상록이나 마저 끝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