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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Apr 07. 2022

인생, 삶의 고단함에서 고상함까지


인생, 위화, 1993년.


가난과 무지, 야만의 역사


지난 세기의 중국 역사는 중국인들에게 어떻게 남아있을까?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말이다. 중국 현대사를 공부했던 모임에서 ‘백사람의 십 년’이라는 책을 같이 읽은 적이 있다. 중국 문화대혁명기에 일어난 억울하고 기막힌 민중의 사연들을 묶은 책인데 다들 읽기 힘들어해서 중간에 그만두었었다. 문화혁명기 전후 격변하던 중국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삶은 처참히 무너져갔다. 그것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던 기억이다.


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구조의 변화를 말해준다. 역사적 사건이라는 건 일정한 흐름을 가지던 구조에 변화를 준 사건이다. 하지만 그 사건들의 나열 속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는 역사책이 아닌 소설책 속에 있다. 위화는 '인생'의 서문에서 '고상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혀 고상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을 쓴 책에 '고상함'을 이야기한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지난 세기에,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가난했고 또 무지했으며, 역사는 야만적이었다. 그 속에서 한 개인의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삶의 고단함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푸구이의 삶이 어서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펑펑 울면서 유칭을 보내고 나서 조마조마하며 펑샤의 행복을 좇았지만 마지막 쿠건까지 황망히 떠나보내고 나니 푸구이가 느꼈을 ‘갈기갈기 찢기는’ 슬픔이 나의 것인 듯 힘들어서 마지막 장까지 서둘러 읽고 얼른 책을 덮었다. '백사람의 십 년'은 읽지 못했고, 위화의 '인생'은 끝까지 읽게 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희망'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푸구이는 좋았던 청년시절을 방탕하게 흘려보내고 모든 것을 잃는다. 푸구이 곁에 남은 것은 가족. 이제 푸구이는 가족들을 위해 살기로 한다. 하지만 운명은 푸구이의 결심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역사는 뒤집어졌다가 다시 또 뒤집어졌다. 전재산을 빼앗아긴 불행 덕분에 살아남게 되고, 전쟁터에서의 전우는 가족을 죽인 원수가 되며, 푸구이가 일구어낸 작은 성취들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어 이리저리 흩어진다. 그러나 푸구이는 생을 놓지 않고 하루를 하루를 충실히 살아간다. 다음에는 조금 더 좋아지겠지, 다음에는 좀 나아지겠지 하며 책을 읽는 나의 심정과 같았을까? 삶의 고단함을 원망하지 않고 오늘을 또 내일을 살아가는 푸구이와 가족들의 마음이 말이다.



삶의 고상함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이 해피엔딩이 되려면 어땠어야 할까 생각해봤다. 그의 가족들이 지난한 시절을 겪고서 여전히 그와 함께 살아 있기만 하다면, 그저 살아있음으로 된 것 아니었을까? 무언가를 갖는 것, 무언가를 이루는 것,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삶을 빛나게 해주는 것이라 여기는 지금 시대에 단지 살아있음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푸구이의 삶은 우리의 '살아있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 예고하지 않는 죽음과 슬픔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것 그 자체가 빛이다. 푸구이 노인이 늙은 소에게 먼저 떠난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성실히 밭을 가는 장면은 마지막에 끝내 가슴 시린 여운을 남긴다.

작가는 스스로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말한다. 푸구이와 소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이 '일체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위화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었다.

나는 차마 영화를 보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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