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책, 이해되지 못한 감정의 표현

이별 직후 자책하고 있는 당신과 나를 위한 글

by 므므

조금 전, 그와 헤어졌다.

화장실 거울 앞에 나란히 꽂혀 있던

분홍색과 파란색 칫솔을 보니,
문득 울컥한다.

함께 양치하며 낄낄대던 우리,


거울 속에서 마주 보며 웃던 그 순간들.

그 웃음들이 이제 이 거울에 다시

비춰질 일은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내가 먼저 안다.


여러 번의 이별 끝에,
칫솔을 치우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은 실수였다고 생각했지만,
두 번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니다.
의지이고, 결정이고, 끝이다.

그리고 그 순간 덮쳐오는 질문들.

"내가 너무 예민했나?"

"내가 좀 더 참았으면, 다시 배꼽 빠지게 웃었을까?"

자책이다.
이 감정은 날카롭지만 익숙하다.


우리는 슬플 때 “슬퍼”라고는 쉽게 말하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움이 고개를 들 때는
“내가 뭘 잘못했나 봐”라는 말로
그 감정을 꾹 눌러버린다.

그 말은 어쩌면—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두려운 마음,
상처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그리고 여전히 그 사람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은

연민의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책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건 마치 이해받지 못한 감정들의 거친 포장지 같다.
겉은 날카롭고 차갑지만,
그 속에는 찔릴까 봐 웅크리고 있는 진짜 마음들이 숨어 있다.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
“나도 참 많이 힘들었어.”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조금만 더 알아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꺼내는 대신,
스스로를 먼저 탓해버린다.
마치 그게 더 안전한 일처럼.


하지만 이제,
자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더 이상 탓하지 말자.

그건 아직도 내 안에서

이해받지 못한 감정들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니까.

그 신호를 조심스럽게,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

“나는 그때 정말 외로웠어.”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사실은, 그냥 더 사랑받고 싶었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자책은 서서히,

조용히
그 본모습을 드러내며 힘을 잃는다.

그 감정들을
마침내 들여다보고 이해해 주는 순간,
그때야말로
그 시절의 나를 부드럽게 놓아줄 수 있는 시간이다.


자책을 멈춘다는 건

더 강해지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더 부드러워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 부드러움이야말로
결국엔 나를
가장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나처럼
그 마음의 언어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이걸로 충분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탄핵에 환호하는 우리, 정말 괜찮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