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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20. 2018

열꽃이 피어오르면, 간절함 속에 스러지거나

강릉단편 #3


소진은 버스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한가로웠다. 서울에는 평일이고 주말이고 언제나 적정 인원이 정해진 것처럼 사람이 있었다. 강릉도 지금은 많은 여행자가 찾는다지만 평일 낮의 시내버스는 한산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당연한 일상인지 모른다. 복잡하고 많고 다양한 것은 사람과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는지도. 늘 분주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소진은 평온함을 느꼈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고 개울이 흐르는 다리를 지났다. 차창 밖으로 드리워진 나무 그늘이 짙었다. 허초희라는 이름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나 강바람의 억새 같은 것이 떠오른다. 소진은 버스 창을 조금 열고 그 틈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도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 없던 아주머니들이 양쪽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시장에 그 물건이 좋다. 그 집 아들 놀러왔드만, 오늘 예쁘게 입었네’ 라는 가까운 안부였다. 하나같이 탄력 있게 말린 그들의 뒤통수에 시선이 닿은 소진은 버스 창을 닫았다.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도 소진의 어깨 위에서 잠잠해졌다.      

그 시대 여자의 재능이란 어쩌면 형벌 같은 것이었다. 천재 시인 백석이 해방 후 북에서 농사일을 했다는 얘기처럼. 시를 쓰던 손에 곡괭이가 들려지고, 그는 농사일을 못한다는 타박을 들었다고 했다. 날에 관한 시를 타고난 예민함으로 쓸지언정, 어떤 날에 밀알을 골라 심어야 좋을지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그 아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없었던 시대는 오죽할까. 시대에 거름으로도 쓸 수 없는 재능은 저를 죽이는 형벌이다. 

소진은 뱉어내듯 긴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열꽃이 피어오른다. 처음에 그 열꽃은 자신마저 들뜨게 하는 설레는 기운을 퍼뜨린다. 짝사랑을 하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냐는 기가 막힌 참소리를 듣게 되는 때다. 열꽃은 점점 커지기 마련이다. 어떤 끝을 내기까지는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간절함을 말하거나, 간절함을 들키거나, 간절함 속에 스러지거나. 소진은 가방에 핸드폰을 떨어뜨리듯 넣고 버스 벨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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