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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21. 2018

너의 생이 나의 생이 되는 공식

강릉단편 #4

 


소진은 허난설헌 생가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이 오랜 세월 거주하며 가꿨을 가옥과 끼 많은 청년들의 몇몇 가게가 어우러진 길이 예뻤다. 큰 마당 앞에 아무렇게나 핀 꽃도 고왔다. 제법 오랜 시간을 걸어 도착한 생가는 커다란 소나무 숲 사이에 있었다. 강릉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솔향 강릉, 어디든 소나무 숲이 함께 했다. 

담 넘어 드러난 생가는 부유함을 자랑하지 않으며 담백했다. 소진은 큰 대문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물터며 담장 안의 꽃나무가 딸을 위한 배려인 듯 탐스러웠다.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으며 스스로 난설헌, 호를 지을 만큼 당찬 여자도 시집이란 굴레를 피할 수는 없었다. 외동딸의 재능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관심을 주었던 아버지와 형제, 요새이자 작은 궁이었을 집을 떠난 15세 소녀는 시집에서 27세의 생을 마감했다. 

조선의 여류예술가로 명명되는 신사임당과 달리 난설헌은 친영례를 하지 못했는데 안타까운 사건의 발단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좋은 시를 짓기보다는 윤기나는 밥을 지어야했던 여느 시집 간 여성들처럼 가부장적이고 엄숙한 보통 여자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남편의 시선은 집 안보다 밖에 있어 원망과 그리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자식이 병들어 보내야했으며, 늘 자신을 지지해주었던 친정 부모와 오빠들도 두고 온 무언가를 찾으러 가듯 앞 다투어 세상을 떠났다. 

난설헌은 매순간 열꽃을 피우고 간절함으로 스러져갔다. 죽기 전 그녀는 자신이 쓴 시를 모두 불태웠다. 시에는 그리움과 상처, 허무와 회환, 피었다가 사그라든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남동생 허균은 뛰어난 재능이 있음에도,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한데도 그렇지 못한 누이를 안타까워하며 허난설헌이 친정에서 쓴 시와 서신으로 보낸 시들을 책으로 엮었다. 

소진은 기념관 옆에 자리한 허난설헌의 시비와 그녀의 조각상 앞에 섰다. 조선에 태어나고, 지금의 남편과 혼인한 것을 가장 후회했다는 허난설헌. 지금의 시대를 산다면 허초희는 밖이 좋아 떠돌아다니는 남편을 하염없이 안에서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친정을 걸어 나왔을 테니, 남편의 생이 자신의 생이 되는 공식을 처음부터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교복 입은 학생들의 무리가 가까이에서 점차 사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소진은 생가를 나섰다.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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