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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창숙 Oct 12. 2021

공짜와 헛 것!

살아온 날의 단상


손주님의 동굴 그리고 헛 것


 사람들은 자신만의 동굴을 찾는다.

혼자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 그래서 한 집에서도 자기 방 하나 갖기를 소원한다. 나도 나만의 방을 가질 수 없을 때 손바닥만 한 거실 옆에 작은 책상과 의자 놓고 내 공간임을 선언했지. 나도 그랬지.


 나의 다섯 손주들의 팀 이름은 독수리 5형제이다. 딸의 아들이 셋, 아들의 아들이 둘 이렇게 다섯 명이 매일 지구를 지키고 있다. 지금 거꾸로 명상 중이신 손주님은 딸의 막내아들로 팀의 4번째이며 지구를 위해 자기만의 동굴에서 명상 중이다. 침대 매트 꺼내 동굴을 만들어 놓고, 인도도 안 갔다 왔는데 명상에 빠져있다. 아니 인도의 명상가들은 똑바로 앉아서 명상하던데, 거꾸로 명상을 개발한 첫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명상 중이다.

                           명상 중인 손주님!


  손주님이 형들 없이 혼자 놀러 왔다. 들어오면서 뜬금없이 나보고 몇 살이냐 묻는다. "일흔이여" 했더니 '일흔' 이 또 몇 개냐고 또 묻는다. 나는 "지가 칠십의 의미를 알기나 하는겨?" 라는 생각에 "칠십"이라고 성의 없이 대답해 주었다. 그랬더니 아주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지? 네 나이를 10번 곱하면 함므니 나이여! 깎아주라." 했더니 정말 오랜 명상 끝에 효험 있는 산신령, 아니 세상을 폈다 접었다 할 수 있는 자처럼 "62요" 한다. 너무 편하게 당당하게 그깟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금방 내 나이를 줄여주었다.


  나는 너무 좋아 "그려? 조금 더 깎아 줄 수 있나?" 했더니 "52요" 하는 것이다. "에구! 52는 뭐여? 끝자리는 빼주게나." 했더니 "좋아요. 50이요." 하며, 맘씨 좋고 아량도 넓고, 백성들의 고뇌가 뭔지 아는 임금님처럼 끝자리를 빼주었다. 그 이하는 내 자식들의 나이와 같아지면 내 이름을 부를까 걱정되어 청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쉰 살'이 되었다. 아, 더 청했어도 깎아 주었을 텐데..


  이 손주님은 내 집에 오면 가재 눈을 뜨고 내가 모아 놓은 갖가지 것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상한 취미를 갖고 있다. 오늘 내 나이를 스무 살이나 줄여 주었으니 상한 취미를 못 본 척 너그럽게 봐줬다. 그리고 스무 살 줄여 준 대가로 꽁꽁 숨겨 놓은 냉동실의 징어 피드기 두 마리를 구워서 대령했고 입가심으로 꼬깔콘과 삐코를 대령했다.


 손주님은 서랍에서 이것저것 뒤지다가 망원경을 찾아내 "함므니! 이게 뭐예요?" 하며 벌써 자기의 눈에 갖다 대고  물었다. 나는 "망원경이여!" 했더니, 작은 눈이 왕방울만큼 커지며  "와! 망원경이요?" 하며 어떻게 하면 보이는지 물었고 나는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손주님은 엄지 척을 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므니가 최고라는 뜻이었다. 나는 일곱 살 손주님 앞에서 마치 모든 것을 척척 만들고 고치는 맥가이버가처럼 어깨를 으쓱했고 의기양양해했다.


 잠시 후  "보인다. 보인다. 함므니 콧구멍"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얼굴 중에서 왜 하필이면 콧구멍이 보인다는 것인가? 나는 나를 보지 말고 지나가는 자동차나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어? 함므니, 저기 악당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어요." 하길래,  나도 독수리 5형제의 팀이 된 양, "암호를 대라. 나는 "오징어" 했더니 척척 손발이 잘 맞는 한 팀처럼 "꼬깔콘" 하는 것이었다. 식탁에 널브러져 있는 오징어와 꼬깔콘이 이렇게 우리의 암호가 되었다. 악당 놀이는 계속됐고 서열이 정해졌는데 나는 어느새 손주님의 부하가 되어 있었다


  손주님은 악당들하고 싸우려면 훈련을 해야 한다며 한 손엔 망원경 한 손엔 효자손을 들고 할아버지 모자를 쓰고 나를 훈련시켰다. 마치 군인들이 구보하는 것처럼 나를 세워놓고  효자손으로 선풍기를 탁! 탁! 치며 박자 맞추어 걸으라 했다.  구령까지 해대며 "하나, 두울, 세엣, 네엣, 하나. 둘. 셋. 넷. 멈춰. 뒤로 돌앗."을 반복했다.


  그리고 또 다른 훈련을 내게 가르치려 했다. 손주님은  특수부대를 맹훈련시키는 훈련대장처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시범을 보였다. 나 보고도 해 보라는 것을 눈을 치켜떴더니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제 형들에게서 배운 두 손을 옆으로  짚고 다리를 위로 올려 한 바퀴 돌리는 것도 해 보라는 것이었다. 악당들을 물리치려면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번에도 두 눈 치켜뜨고 소리를 질렀다. "나, 탈퇴할 ." 그 소리에 손주님은 실눈 뜨며 싱긋 봐주겠다고 했지만 봐준 게 아니었다. 다른 것을 다 못한다고 하니 계속 '하나, 두울, 세엣, 네엣, 하나, 둘, 셋, 넷. 멈춰. 뒤로 돌앗'을 연거푸 시켰다.


 손주님의 구령이 우렁차 질수록 내 종아리는 땡땡해져 갔다. 종아리는 어제저녁 11918 걸음 걷고 온 것보다 더 땡땡해져 마치 높은 산이라도 올라갔다 온 것처럼 뒤꿈치도 당겼다.


 그러나 손주님은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개선장군처럼 신이 나 있었고 정말 훈련대장이 된 것 같이 목소리도 걸쭉하게 변해 있었다.


  '띵똥' 초인종 소리와 함께 손주님의 엄마가, 즉 내 딸이 왔다. 손주님은 훈련을 끝내야 한다는 아쉬운 눈빛으로, 나는 구세주를 만난 기쁨의 눈빛으로 오늘 훈련을 끝냈다. 손주님은 또 오겠노라 하면서 "꼬깔콘"을 외쳤고 나도 "오징어"로 답했다.


오호! 통재라!

이날 저녁 나는 산책을 할 수 없었다. 어정거리는 것이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차피 나이를 줄여 도 줄여지지 않는 것이었거늘..

공짜의  헛 것에 마음을 뺏긴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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